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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May 13. 2023

자연을 사랑하는 수학자

『창조적 진화』(앙리 베르그송) 강독 후기

여름은 하루만에 온다.


무던히도 걸었다. 뼈가 시릴 정도로 추웠던 겨울날부터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여름날이 될 때까지. 마음이 복닥거리는 날에는 밖에 나가 무작정 걷는다. 예전에는 방에 처박혀 유튜브 세상을 배회했다. 이제는 밖에 나가 자연을 본다. 어쩌면 그 차이가 모든 것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금만 걸으면 한강과 작은 개천을 만날 수 있는 곳에 사는 것은 행운이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를 사랑한다. '집'과 자연이 있는 곳. 하염없이 걷다보면 잠시 멈춰서고 싶은 곳이 있다. 한강에 홀로 앉아, 개천에 홀로 앉아 많이도 울었다. 어느 날이었다. 앙상했던 가지에 꽃망울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이제 곧 꽃이 피려나보다, 생각했다. 꽃은 피지 않았다. 꽃은 며칠 지나서 폈다. 하루만에 온 나무의 꽃이 폈다.


나무가 초록이 되던 순간도 기억한다. 핀 꽃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한번에 지더니 한번에 초록이 되었다. 하루만에 온 나무가 초록이 되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걷던 어느 날, 작은 개울가에 내가 좋아하는 벤치에 앉아 개천을 바라보았다. 여름이 왔다. 여름이 하루만에 와 버렸다. 자연은 한걸음씩 오지 않는다.





"어제는 나를 껴안고 오늘은 나에게 칼을 꽂는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 삶의 구체적인 문제는 이것이었다. 철학을 믿음으로 배우는 데에는 함정이 있다. 믿음은 정신을 속인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옳다고 믿으면 무언가가 옳게 느껴진다. 하지만 삶에서 나를 시험하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내 믿음의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이 상황에서도 나는 '믿을' 것인가?


요즘 나의 화두는 ‘모순’이다. 나는 ‘모순’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양자역학에 그토록 집착했던 것도 그 이유다. 참 나다운 발상이다. 과학으로 모순을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 이제야 알겠다. 과학은 인간의 언어다. 인간의 언어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오만이다. 인간은 자연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을 이해할 수 없을 때는, 과학이 아니라 자연을 보아야 한다. 그곳에 모든 것이 있으니.


"어제는 덥다가 오늘은 추운 날씨를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름이 하루 만에 온 것을 깨달은 날, 그 문장이 마음에 떠올랐다. 어제는 덥다가 오늘은 추운 날씨는 모순이 아니다. 그것이 모순처럼 느껴질 때는, 내가 오늘 덥기를 바랬을 때뿐이다. 오늘 소풍을 가려고 했는데 어제까지는 쨍쨍하다가 오늘은 비가 오면, 날씨가 변덕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낮에는 반팔을 입어야 하다가 밤에는 패딩을 입어야 하는 날씨는 모순인가? 아니다. 그것이 모순으로 느껴질 때는, 내가 밤에 입을 패딩을 챙겨오지 않아 감기에 걸릴 것 같을 때뿐이다. 자연에 모순은 없다. 모순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


이날은 추웠다, 많이. 추워서 눈물이 났다.




“어제는 나를 좋아한다 말하고 오늘은 나를 해치는 사람을 어떻게 믿어!”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무심코 뱉은 말이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알았다. 모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의 실체. 그것은 상처받기 싫은 마음이다. ‘배신’은 무엇인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다. 애초에 아무도 믿지 않는 사람은 배신도 당하지 않는다. 대신 그 사람에게는 끝없는 염세만이 남겠지. 믿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믿었길래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던 걸까? 여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스스로에게 코웃음이 났다. 나는 네가 나를 상처주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 믿음은 너를 향한 믿음이 아니다. 그 믿음은 나를 향한 믿음이다.


“믿어준다는 것은 무엇인가?”


작년에 스승과 함께 내 삶을 돌아보는 글쓰기 수업을 했다. 그때 풀지 못했던 화두다. 누군가가 나를 믿어준다는 것. 내가 누군가를 믿어준다는 것. 그건 무엇일까? “혜원이는 잘 할 거야!” 내가 아버지에게 받아온 믿음이다. 그 믿음은 나를 씩씩하게 만들어주었지만 기쁨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항상 잘해한다는 강박 때문에 오히려 내 삶을 우울에 빠뜨렸다. “혜원이는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어!” 내가 스승에게 받은 믿음이다. 그 믿음은 나를 고통스럽게 할 지언정 기쁨으로 이끌어주었다. 그 두 믿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다.


나를 향한 믿음과 너를 향한 믿음. 나를 향한 믿음은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상처받기 싫은 것이다. 희망의 끝에 공포가 있고 안도의 끝에 절망이 있듯, 그런 믿음의 끝에는 배신이 있다. “나에게 상처주지 않을 것이라 믿었는데,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 이것이 배신감의 실체다. 나는 나에게 상처주지 않을 것 같은 사람만 믿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 믿음은 사랑의 전제조건이다. 나는 나를 지키려는 가짜 믿음밖에 몰랐기에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은 모순적 존재일까? 아니다. 날씨가 모순적이지 않듯, 사람도 모순적이지 않다. 다만 그 흔들리는 흐름을 내가 느끼지 못할 뿐이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일이 꽃이 피는 바로 그날임을 안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일이 여름이 오는 바로 그날임을 안다. 하루만에 꽃이 폈다고 느낀 것, 하루만에 여름이 왔다고 느낀 것. 그것은 꽃과 여름을 덜 사랑하는 나의 둔감함일 뿐이다. 지각의 섬세함은 사랑의 밀도와 비례한다.


나는 나를 껴안고 나를 해쳤던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사람의 모순을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모순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오늘은 해가 쨍쨍하고 내일은 비가 쏟아지는 자연을, 어찌 이럴 수 있냐며 탓하는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다. 오늘은 해가 쨍쨍하고 내일은 비가 쏟아지기에 자연이다. 해가 쨍쨍한 날에도 잠재적 비는 내린다.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잠재적 햇빛은 비춘다. 다만 그 순간 어디로 응결되느냐에 따라 비가 내리고 해가 비치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자연은 모순이다. 자연은 모순이 아니다. 자연으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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