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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May 20. 2023

사랑과 증오는 같다

『창조적 진화』(앙리 베르그송) 강독 후기

“나 걔 생각을 왜 이렇게 많이 하지?”


어느 날 샤워를 하다가 문득 든 생각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언젠가부터 하루 종일 내가 싫어하는 사람 생각만 하고 있었다. 헛웃음이 났다. 이거 거의 사랑에 빠졌을 때와 같은 정신 상태 아닌가? 그랬다. 마치 처음 연애를 하면 하루 종일 그 사람 생각밖에 안 하듯, 언젠가부터 내가 싫어하는 사람 생각을 하루종일 하고 있었다. 산책을 할 때도, 운동을 할 때도, 샤워를 할 때도, 심지어 자기 전에도 그 사람 생각을 했다.


그뿐인가. 마음이 요동치는 증세도 비슷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온 신경이 그 사람에게 간다. 그 사람이 없어도 그 사람 이름만 들리면 귀가 쫑긋 곤두서고, 그 사람과 별 관련 없는 이야기도 온통 그 사람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증오하는 이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고등학교 때 참 싫어했던 친구가 있다. 나는 학교에서 그 친구 이름만 나오면 귀가 쫑긋 섰다. 대학교 때도 참 더럽게 헤어져서 오랫동안 싫어했던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와 헤어진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세상만사를 그 친구와 관련지어 생각했다. 그 친구 소식만 들어도 심장이 뛰고 얼굴에 열이 났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떠올릴 때처럼.


사랑과 증오는 같다. 자연은 모순이고 또 모순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날, 불현 듯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이다. 자연에 왔다. 마음이 사막 같아서 바다를 보러 왔다. 바다에 와도 하는 짓은 똑같다. 평소엔 한강변을 걷다가 오늘은 해변길을 정처 없이 걸었다. 모래사장도 걷고 소나무숲도 걷고 작은 골목길도 걸었다.





사고는 언제 사건이 되는가? 사고를 ‘어둠’이 아닌, ‘진동’으로 받아들일 때다. 소나무숲을 걸으며 생각했다. 사랑도 요동치는 마음이고 증오도 요동치는 마음이구나. 사랑과 증오는 나의 시선에서 볼 때만 반대 개념('빛'과 '어둠')이지, 자연의 관점에서 볼 때는 둘 다 ‘진동’일 뿐이다. 사랑의 고통과 증오의 고통은 둘 다 ‘진동’의 고통에서 오는 것이다. 격랑 같은 사랑에 빠졌던 적이 있다. 격랑 같은 사랑은 고통스럽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고통이 바로 역동적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난데없는 지진에 놀라고 당황하여 온몸이 얼어붙었다. 내 세계가 깨지는 것, 나와 완전히 다른 타자의 세계로 장님이 되어 들어가는 것, 그 사이에 수많은 감정들이 뒤엉켜 해일처럼 몰아치는 것. 누군가 사랑은 자신의 중심을 버리고 상대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했다. 참 로맨틱한 말이지만 실제로 겪으면 멀미와 현기증 그 자체다. 심지어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꼭 강간범처럼 느껴진 적도 있다. 나도 모르는 새 자꾸만 나에게 사정을 하고 도망가 버리는 강간범. 나는 속수무책으로 아픈 배를 부여잡고 밤을 지새우며 발만 동동대는 심정이었다. 그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고통 끝에 아이를 낳는다는 것을. 아이는 고통스럽게 낳았기에 예쁘다는 것을.


사랑하는 이는 나를 요동치게 한다. 증오하는 이도 나를 요동치게 한다. 사랑의 환희가 사그러들면 그 사랑의 한계에 다다르게 된다. 그 한계에서 마주하는 것은 언제나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이다. 사랑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다. 그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쉽지 않기에 거기서 그 사랑은 끝이 나게 된다. 사랑은 애를 쓰며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싫어하는 나를 직면하고 그것을 악착같이 넘어보려 애를 쓸 때 비로소 그 사랑의 다음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랑의 지속은 그렇게만 가능하다. 너를 더 사랑하기 위해 ‘싫어하는 나’를 직면하는 것. ‘싫어하는 나’는 나의 어둠이다. 나의 어둠은 왜 생기는가? 상처받은 기억 때문에 생긴다. 너를 더 사랑하기 위해 너무 아파서 묻어놨던 내 상처를 꺼내보는 것. 사랑은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만 이어진다.


증오는 어떠한가? 증오의 끝에서 발견하는 것도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이다. 나를 임신시켜놓고 도망가버린 남자친구를 오랜 시간 증오했었다. 그 남자 때문에 온 세상 남자들이 다 싫어질 지경이었다. 증오를 지속하는 것은 어렵다. 누군가를 계속 사랑하는 것이 힘들고 고되듯 누군가를 계속 증오하는 것도 힘들고 고되기 때문이다. 사랑도 진동이고 증오도 진동이다. 진동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보통은 더 자라날 수 있는 사랑과 증오를 스스로 잘라버린다.


그 남자친구에 대한 증오가 그랬다. 나는 그때 상처받았지만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 타지에서 혼자 그 일을 감당해야 했고, 그 사실을 안 엄마가 자기연민에 빠지는 바람에 죄책감까지 떠안았기 때문이다. 난 그때 이후로 그 일을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다.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 같았다. 남자친구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엄마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 상자를 열었다. 상자를 열었더니 상처가 곪아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때 못 울었던 만큼 많이 울었다. 사랑 받지 못한 내가 그렇게 불쌍했다. 그 자기연민이 지나고나니 보였다. 내가 그 남자친구를 그토록 증오한 이유. 그건 그의 비겁함에서 나의 비겁함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를 두고 도망가 버렸듯, 나도 아이를 두고 도망가 버린 셈이니까. 그때 내가 조금 더 강건했더라면, 내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었다면, 나는 그 아이를 낳았을 것이다. 그때 내 몸은 그것을 원했으니까. 그 사실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알았다. 그때 그 남자친구에 대한 증오는 끝이 났다.



어쩌면 타자란 강간범인 것일 수도 있겠다. 사랑하는 이도 내 안에 사정을 하지만, 강간범도 내 안에 사정을 한다. 사랑도 증오도 그냥 들이닥치는 것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들이닥친 타자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뿐이다. 사랑은 너를 더 아껴주기 위해 나의 어둠을 들추는 일이고, 증오는 너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기 위해 나의 어둠을 들추는 일이다. 그 힘은 어디서 오는가? 지금까지 내가 받은 사랑에서 온다. 사랑 받았을 때 더 사랑하고 싶어지고, 사랑 받았을 때 덜 미워하고 싶어진다. 문제는 기만이다.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한다 착각하는 것, 증오하는데 증오하지 않는다 착각하는 것. 사랑과 증오가 드러내는 것은 '나의 한계'다.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때까지 사랑해야겠다. 더 이상 증오할 수 없을 때까지 증오해야겠다. 너는 사정을 했고 나는 분열을 한다. 분열을 견디지 못하면 사랑도 증오도 할 수 없다. 진지하게 사랑하고 진지하게 증오할 테다. 언젠가 요동을 진동으로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사랑과 증오는 같다. 매혹과 교통사고는 같다. 모두 진동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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