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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Sep 14. 2023

홍상수와 김민희, 사비오와 카실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보고

홍상수, 김민희 커플에 대한 나의 감정은 지금까지 총 세 번이 바뀌었다. 그 커플은 여전히 내가 주의attention를 기울이는 대상이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욕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욕망하는 것은 언제나 나의 지금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 역할을 한다. 홍상수, 김민희 커플이 나에게 그랬다. 그 커플의 ‘불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화가 났다. 그 당시 나는 철저하게 홍상수 씨의 아내 입장, 아니 어쩌면 그 아내가 상징하는 가부장적 체제의 수호자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봤다. 싸구려 타블로이드 지를 보면서 홍상수 씨 아내가 가정에 굉장히 헌신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 사실을 알자마자 나의 분노는 정당화되었다.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렇게 노력해온 사람이 한 순간에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헌신짝처럼 버려진다고? 결혼은 일종의 계약이잖아. 계약을 한번 맺었으면 지켜야 하는 거잖아. 나는 그 당시 홍상수 씨가 했다던 "죽어도 좋다"라는 말이나, "그녀는 나를 남자로 만들어준다"는 말이나, 아내에게 했다던 "우리 30년이면 충분히 같이 잘 살았잖아"라는 말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게 그 당시 나의 사랑에 대한 감수성이었다.


하지만 그후 삶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그 커플을 바라보는 내 심정은 분노에서 동경으로 급변했다.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 아니 오히려 사랑은 결혼의 가장 먼 곳에서 피어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 나는 결혼제도의 수호자 입장을 내팽개치고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도 저런 사랑 한 번 해보고 싶다!” 홍상수, 김민희 커플을 보며 생각했다. 어느덧 나는 홍상수 씨 아내가 아니라 김민희 씨에게 감정이입하기 시작했다. 김민희 씨가 홍상수 씨와의 관계가 밝혀지고 난 뒤, 모든 영화와 광고 제의가 끊겼다는 것. 아직 젊다면 젊은 나이에 온 대중들의 비난과 질타, 구설의 중심에 서버렸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상수 씨와의 사랑을 지켜나가고 그 사랑에 대한 당당함을 유지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기에 그녀를 동경했다. 김민희 씨는 사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아니었다. 내 눈에 그녀는 그다지 실력이 있지도 깊이가 있지도 개념이 있어보이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사건이 터지기 전 어느 인터뷰에 그녀가 한 말이 마음에 꽂혔다. “일과 사랑 중에서 전 언제나 사랑을 택해 왔어요.”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에 그 무엇도 택하지 못하고 항상 부유하기만 하던 나는 그녀의 그 말이 참 멋있게 느껴졌다. 나에게도 그런 사랑이 찾아오기를, ‘홍상수’ 같은 강렬한 타자가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그 당시 나는 운명적인 사랑에 꽂혀 있었다.



백마탄 왕자님이라도 기다렸던 걸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렬한 대상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나도 사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김민희 씨를 동경하던 시절, 나는 나를 지금의 삶에서 끄집어내줄,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을 건 도약’을 하게끔 해줄 어떤 강력한 타자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감정이 ‘동경’에 머물렀던 것일 테다. 그후 또 이런저런 일들이 내 삶에 일어났다. 그런 뒤 나는 김민희 씨가 아닌 홍상수 씨에게 감정이입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내가 김민희 씨를 동경했던 건, 어떤 타자가 내 삶을 구원해주길 무기력하게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걸.


힘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걸 알고나서부터 나는 김민희 씨가 아닌 홍상수 씨가 되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김민희 씨에게 그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어떤 면을 발견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김민희 씨를 의존적인 사람이라 착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김민희 씨 입장에서 홍상수 씨가 자신의 삶을 깨부숴줄 어떤 백마탄 왕자였을 것이라고 오해한 것이다. 그런 면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김민희 씨의 삶에서 열리지 못했던 어떤 부분을 홍상수 씨가 열어주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도 지금 가진 걸 버리고 자기가 사랑하고 싶은 걸 사랑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있었다. 홍상수 씨도 마찬가지다. 홍상수 씨도 자기가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할 힘이 있다. 의존적인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하지 못한다. 의존적인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할 수 없다. 의존하고 싶은 것을 사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홍상수 씨와 김민희 씨는 자기가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했다. 그들은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사랑은 역량이다. 사랑은 운명이 아니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행복하다. 진정한 윤리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기쁨을 쫒는 것이다. 그들은 (도덕적이지 않을 뿐) 누구보다 윤리적이다.


그후 나는 사랑의 역량을 키워나기기 위한 이런저런 수행을 해나갔다. 홍상수 씨처럼 되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스승과 대화를 하다가 나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스승이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라는 영화를 추천했다. 아버지에 대해 이해하고 싶으면 그 영화를 한번 봐보라는 것이었다. 그 영화를 봤다. 몇 주의 시간이 흘렀다. 마음이 계속 복닥거렸고 글을 쓰고 싶은데 용기가 잘 나지 않았다. 느닷없이 예전에 홍상수, 김민희 커플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홍상수 씨 딸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던 게 생각났다. 김민희 씨가 이 사건 때문에 광고 계약이 파기되어 위약금을 물어야 되는 상황이 되자, 홍상수 씨가 자기 딸의 유학비를 빼서 그것을 메꿔줬다는 이야기였다. 졸지에 홍상수 씨 딸은 유학 생활을 도중에 접고 한국으로 귀국을 해야 했다고 했다. 내가 결혼 생활의 수호자였을 때도 나는 그 딸에게 감정이입을 했었다. 아버지가 어떤 젊은 년이랑 바람이 나서 그 젊은 년 광고 계약비 메꿔준다고 내 유학비를 뺀다고? 그 젊은 년이 굶어죽을 정도로 가난한 것도 아니고, 충분히 먹고 살면서 품위유지까지 할 수 있는데도? 그런 일이 나에게 벌어지면 나는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느낄 것 같았다. 나의 선은 거기에 그어져 있었다. 나는 불륜 그 자체에 대한 금기는 없다. 아버지가 바람을 폈거나 핀다고 해도 놀랍지도 않고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관계가 가족들보다, 아니 더 정직히 말해 나와의 관계보다 우선시된다면, 아버지가 나의 유학비를 빼서 그 년 위약금을 물어주는 일이 일어난다면, 아버지가 모든 유산을 우리 가족이 아닌 그 년에게 물려준다고 한다면, 나는 아버지가 드디어 사랑을 하게 된 것 같아 기쁘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할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그 년에게는 증오와 적개심을 느낄 것이다. 그 선이 나의 금기이고 나의 한계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금기이고 한계이기에, 그것은 나의 아버지의 금기이고 한계이기도 하다. 나는 아직 사랑할라면 멀었다.




의존적인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수 없다. 나는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스승이 추천한 영화를 보고 글을 써보려고 몇 주를 머뭇댔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제 레슬링을 하고 갔다오는 길에 문득 그 영화의 한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영화의 주인공 사비오는 성공한 저널리스트다. 나이는 90세. 어린 시절 고상하고 우아한 어머니를 사모했고 어머니가 떠난 후 단 한번도 여자를 마음에 들인 적이 없다. 사비오는 창녀촌이 또다른 집이다. 성공한 남자가 그렇듯 창녀촌의 창녀들에게 늘 환대를 받고 자기가 하고 싶을 때 섹스를 하고 자기가 떠나고 싶을 때 떠난다. 그는 젊은 시절 결혼을 하려고 했지만, 결혼식 날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그날도 창녀촌의 창녀들, 아니 어쩌면 그가 어린 시절 갈망했던 수많은 엄마들의 알몸에 파묻혀 밤을 보낸다. 그런 그를 사랑했던 한 창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카실다. 그녀는 그와 몸을 섞은 뒤 그를 부드럽게 만져주며 이렇게 말한다.


“돈 안 받고도 할 수 있어요.”

“나 죽은 뒤에 그렇게 해.”

“왜죠?”

“내 원칙이야. 돈 안 주곤 안 해.”

“그럼 나도 당신과 하고 싶을 때 돈 내고 해도 돼요?”

“안 돼.”

“불공평해요.”

“카실다, 삶은 원래 공평하지 않아.”



그는 침대 옆 탁자에 지폐더미를 툭 던지고 카실다에게 키스한다.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카실다는 다시 그와의 키스에 빠져든다. 레슬링을 하고 집에 가는 길, 나는 그 장면이 떠올랐다. “돈 안 받고도 할 수 있어요.” 난 왜 그 말을 하지 못했을까. “그럼 나도 당신과 하고 싶을 때 돈 내고 해도 돼요?” 난 왜 그 말도 하지 못했을까. “삶은 원래 공평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사비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삶은 원래 공평하지 않지만, 사랑은 공평해요.” 공평(동등)하지 않는 관계에 사랑은 싹틀 수 없다. 카실다는 그것을 알았고, 사비오도 그것을 알았다. 카실다는 사랑하고 싶었기에 동등해지고 싶었고, 사비오는 사랑하고 싶지 않았기에 동등해지고 싶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도 사랑하고 싶지 않기에 동등해지고 싶지 않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도 사랑하고 싶지 않기에 동등해지고 싶지 않다. 지폐를 쥐여 주어야만 키스할 수 있는 사비오. “난 돈 안 받고도 할 수 있어요.” 나는 그 말을 할 수 있는가.


아흔 살이 되어 열아홉살 풋처녀에게 처음 사랑을 느끼게 된 사비오. 그런 사비오에게 할머니가 된 카실다가 나타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진정한 사랑의 경이를 맛보기 전에 죽진 마세요.”



그 말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나는 진정한 사랑의 경이를 맛보기 전에 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아직 사랑의 역량이 없어서 사랑하지 못하지만, 그 누구보다 사랑해주고 싶은 나의 아버지에게 말해 주고 싶다. “진정한 사랑의 경이를 맛보기 전에 죽지 마세요.” 늘 죽음을 생각하고 사는 아버지에게 사랑을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 대상이 열아홉살 풋처녀이든, 젊은 여배우 년이든, 간병인든 상관없다. 아니 상관 없고 싶다. 내 욕망의 변화는 중요하다. 그것이 아버지의 욕망에 작은 변화라도 일으킬 일말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동등해지고 싶다. 나는 카실다가 되고 싶다. 돈 안 받고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젊은 카실다가 되어, 나중에는 늙은 사비오에게 사랑하는 그 아이를 찾으면 구닥다리 낭만은 집어던지고 악마에게 선물받은 당신의 물건으로 사랑을 듬뿍 주라고 웃으며 말해주는 늙은 카실다가 되고 싶다. 카실다는 마음을 다해 사랑해서 행복했을 것 같다. 사비오가 끝끝내 지폐 더미를 탁자에 놓고 가도, 그래서 홀로 상처받고 혼란스러웠어도, 시간이 흐른 뒤 행복했을 것 같다. 늙은 카실다가 되고 싶다. 늙은 사비오에게 말해주고 싶다. "진정한 사랑의 경이를 맛보기 전에 죽진 마세요." 그게 나의 슬픈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언젠가 바람난 아버지와 바람난 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홍상수의 딸 시점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 그게 내 진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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