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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Nov 12. 2023

파르헤시아(정직하게 말하기)

『주체의 해석학』(미셸 푸코) 강독 후기

사랑하는 이에게 정직한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너에게 나의 어둠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건 그나마 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진짜 어려운 일은 너의 어둠을 정직하게 비추는 것이다. 그게 사랑하는 사람이 져야 하는 잔인한 의무다. 너가 가장 숨기고 싶은, 너의 가장 어둡고 뒤틀어진 모습을 투명한 거울로 비춰주는 것. 그게 파르헤시아다.


나의 어둠을 직면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그것을 내가 가장 사랑받고 싶은 이에게 들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고통을 바라보고 있는 이도 죽을 맛이다. 내가 그 어둠을 끄집어낸 것이니까. 내가 들고 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어둠을 보며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너를, 거울을 든 채 바라보고 있는 일은 고통스럽다. 그 거울을 들고 있는 손은 덜덜 떨린다. 너의 고통이 전해져서 고통스럽고, 네가 그 고통이 너무 커서 혹시라도 등돌리고 나를 떠나가 버릴까봐 고통스럽다. 그래서 내가 비추어놓고도, 그 거울을 들고 있는 손은 떨린다. 마음을 졸인다. 내가 너의 어둠을 비출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아주기를. 등 돌린 채 떠나버리지 않기를. 파르헤시아는 어렵다. 그런데 그게 사랑하는 사람의 의무다. 너가 더 이상 슬퍼지지 않길, 네 삶이 조금이라도 밝아지길, 우리가 좀 더 오래 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덜덜 떨리는 손으로 거울을 쥔다. 거울에 비춰진 자는 사랑과 고통 사이의 심판대에 선다. 사랑이 이기면 거울 뒤에 내가 보이고, 고통이 이기면 거울 뒤에 나는 보이지 않는다. 거울 뒤에 내가 있다는 걸 알아채게 되었을 때, 거울을 쥐고 있던 내 떨리는 손도 눈에 들어온다. 그때 한 사람은 세상에 ‘내’가 아닌 ‘너’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네가 나를 사랑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파르헤시아를 할 수는 없다. 아니 네가 나를 사랑해주길 바라는 마음은 파르헤시아에 선행되어야 한다. 그 마음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에게 파르헤시아의 자격이 주어진다. 파르헤시아의 동력은 무엇인가? 네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역설적이게도 파르헤시아는 사랑이 아닌 이별을 생각할 때 할 수 있다. 내가 네 곁에 없어도 네가 다른 ‘너’들을 사랑하며 살 수 있기를. 그렇게 공허하고 외로운 삶이 아닌, 충만하고 기쁜 삶을 살 수 있기를. 언젠가 너도 떨리는 손으로 누군가를 비추어줄 수 있기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네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부지런히 널 비추어야 한다. 그래야 언젠가 내가 네 곁에 없어도 네가 덜 슬플 수 있을 테니까. 아니 충분히 슬퍼한 뒤 다시 기쁘게 다른 이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파르헤시아는 헤어질 각오에서 온다. 사랑은 이별을 준비할 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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