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원 Nov 12. 2023

암송

『주체의 해석학』(미셸 푸코) 강독 후기

언젠가부터 스승의 책은 나의 '바이블'이 되었다. 연애가 안 풀리면 스승이 연애에 대해 쓴 책인 <철학보다 연애>를 펼친다. 삶에서 내 깜냥으로 감당하기 벅찬 일이 일어나면 언젠가 스승이 삶에서 물러서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했던 이야기를 쓴 <세상이 나를 몰아세울 때? 가드 올리고 도망치지 말 것!>을 펼친다. 책 뿐만 아니라 스승의 조각글도 마찬가지다. 내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떠오르는 스승의 글이 있다. 글이 떠오를 때도 있고, 문장이 떠오를 때도 있다. 이미 너무 많이 읽었기에, 아니 처음 읽을 때부터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었기에 굳이 외우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외워져버린 글과 문장이다. 그 글과 문장들이 마음에 가득 채워져 있다가 내 삶에 어떤 사건과 마주치면 마음속에서 화학작용이 일어나 튀어나오는 느낌이다. 그 화학작용이 일어났을 때 나는 내 글을 쓴다. 그 글을 쓰면 나는 어떤 다른 배치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나의 바이블


'암송'. 푸코는 자기배려의 방법 중 하나로 '암송'을 예로 든다. 들뢰즈도 말하지 않았던가. “시를 마음으로 새겨야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심장은 반복을 사랑하는 기관이다.” 마음으로 새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암기가 아니라 암송이다. 심장은 반복을 사랑하지만 항상 같은 반복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박동은 반복이지만 언제나 차이 나는 반복이기 때문이다. 시를 마음에 새기는 과정. 어떤 글, 어떤 문장을 마음에 새기는 과정도 같다. 그 글과 문장을 앵무새처럼 읖조리고 형광펜으로 줄 쳐가며 외운다고 마음에 새겨지는 것은 아니다. 차이 나게 새겨야 한다. 그 글,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그 글, 그 문장을 읽는 내가 다른 배치 안에 있어야 한다. 내가 항상 같은 배치 안에 있을 때 같은 글, 같은 문장이 다르게 다가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한때 내 스승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성경을 읽는 마음으로 읽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나는 아직 기쁨의 삶을 스스로 살지 못한다. 요즘은 스스로 기쁠 수 있는 주체가 되어 간다는 것은 스피노자가 말한 ‘자기원인’에 가까워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직 스스로 기쁠 수 없기에 '외부원인'이 필요하다. 나에게 그 외부원인이 스승의 글 아닐까. 몸을 움직이면 틈이 생긴다. 나는 '바이블'을 읽는 행위가 마음에 틈을 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푸코도 자기배려의 방법으로 '암송'과 더불어 '산책'을 이야기하지 않았나. '산책(운동)'이 몸에 틈을 내는 과정이라면, '암송'은 마음에 틈을 내는 과정이다. 세상에 짓눌려 마음이 꽉 막혀 있을 때, 스승의 글을 읽으면 마음에 신선한 공기가 불어넣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햇살 좋은 날 산책을 하거나 즐겁게 땀흘리며 운동하고 난 뒤의 기분과 비슷하다. 사실 스승 곁에서 5년 째 철학을 배우고 있는 나에게, 스승의 글 중 완벽하게 '새로운' 것은 거의 없다. 사실 모든 글들이 이미 귀에 딱지가 않을 정도로 많이 듣고 읽은 내용이다. 하지만 그 반복될 대로 반복된 ‘새롭지 않은’ 내용들이 늘 나를 환기시킨다. 그게 '바이블'의 힘이다. '바이블'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한 일이다.


스승의 바이블


암송의 두 가지 작용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불안할 때 암송을 한다. 그러면 오래 반복했던 일을 다시 반복하는 것에서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아마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는 행위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것은 암송을 '소극적 정화'로 쓰는 것이다. 암송의 '적극적 정화' 작용은 무엇일까? 그건 반복을 통해 차이를 내는 것이다. 그건 암송의 대상이 ‘사랑’의 대상일 때만 가능하다. 암송을 통해 한 사람이 보이게 될 때가 있다. 난 스승의 책을 통해 그 시절의 스승을 만난다. 그러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지면서, ‘나도 지금처럼 살아서는 안 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반복된 암송을 통해 부끄러움이 응집된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충분히 응집되면, 내 삶에 차이를 만들어낼 실천을 하게 된다. 아마 기독교인들도 정말로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성경을 소극적 정화 작용으로만 소비하지는 못할 것이다. 예수를 사랑한다면 나도 예수처럼 살고 싶어질 테니까. 아니,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예수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울 테니까.




요즘 스승의 주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책을 편집하고 있다. 스승의 원고를 편집하는 일은 나에게 일 이상의 의미를 띤다. 어쩔 때는 종교 의식 같기도 하다. 이번 책을 작업하면서는 ‘앞으로 내 삶의 바이블이 될 책을 내 손으로 직접 엮고 있네!’라는 생각을 했다. 선물 포장을 할 때의 느낌과도 비슷했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그 선물을 포장하는 순간이 좋다.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포장지를 골라 곱게 접어 꼼꼼히 포장할 때의 마음. 뭔가 이번 책을 작업할 때 그것과 비슷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세상에 왜 '양장본'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마음으로 알았다. 삶에서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반복해서 펼쳐볼 책을 '바이블'이라고 한다. '바이블'은 반복해서 읽을 책이기에 혹시라도 종이가 찢어지거나 표지가 헐어버릴 수 있으니 종이를 한땀한땀 실로 꼬매 튼튼한 가죽을 덧댄 '양장본'으로 만드는 것이다. 출판을 처음 배울 때, 제본 방식에는 '양장'과 '무선'이 있고, '양장'은 좀 어렵고 있어보이는 책, '무선'은 좀 가볍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 때 채택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그건 참 주객이 전도된 생각인 것 같다. ‘바이블'이 될 만한 가치가 없는 책(반복해서 읽을 필요가 없늠 책)을 ‘양장'으로 만들어 '바이블'처럼 보이게만 한 책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그런 '양장본'은 참 부끄럽고 민망하다.



스승이 이 책의 원고를 넘겨주었을 때 덧붙였던 글이 있다.


진정한 선물은

'나'를 위한 '너'의 선물이며, 동시에 '너'를 위한 '나'의 선물이어야 한다.

'나'를 위한 '너'의 선물,

'너'를 위한 '나'의 선물을 보낸다.


이 책을 만드는 시간은 이 글을 진정으로 이해해나가는 과정인 것 같다. 아직은 어렴풋하다. 하지만 계속 이 글이 마음을 맴돈다. 아마도 이 글이 마음에 새겨지는 순간은, 스승의 ’너'를 위한 '나'의 선물을, 내가 다시 '너'를 위한 '나'의 선물로 돌려주었을 때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제는 그 '너'를 위한 '나'의 선물이, 다시 '우리'를 위한 '너'와 '나'의 선물이 되는 순간 역시 맞이해보고 싶다. '나'의 바이블이 오로지 '나'의 바이블로 끝나서는 안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것 역시 참 부끄러운 일일 테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르헤시아(정직하게 말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