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외투>가 건네는 말

"고골의 아카키와 나의 '글쓰기'

by 책사냥꾼 유은



우리 모두는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 -도스토옙스키



책, 오직 '읽기'만을 위한 존재일까요?


이태준 작가님의 『무서록』에는 이런 의미심장한 구절이 있습니다. "책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하면 다 되는 것이 책이다. 책을 읽기만 하는 것이라며, 그건 책에게 너무 가혹하고 원시적인 평가다.” 책이 우리에게 주는 다채로운 경험과 그 존재 방식이 오직 '읽힘'으로만 한정된다면, 어쩌면 우리는 책의 본질 중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의 '책 사냥' 활동에 커다란 힘을 실어주는 문장이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책을 오직 '읽기 위한' 목적으로만 구입한다면, 매번 그토록 많은 책들을 '사냥'하는 일은 너무도 벅찬 과제가 될 테지요. 어떤 책은 전체를, 또 어떤 책은 일부만을 읽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읽지 않고 소장의 의미로만 간직하는 '사냥'도 가능합니다.


책을 '본다'는 표현은 쇼핑할 때 편안하게 둘러보는 것처럼, 전혀 부담 없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어루만지기 위해서'라는 표현이에요. 책의 촉감이 좋아서, 그리운 책 냄새를 맡고 싶어서, 혹은 그 책의 디자인이나 삽화가 마음에 끌려 책을 찾는 경우도 분명 있으니까요.



『외투』, 숨결 닿는 만남: 읽기, 보기, 어루만지기


이번에 저는 니콜라이 고골의 단편 「외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순전히 독서토론 모임의 과제로 만난 작품이었지만, 의무적인 부담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참으로 매력적인 이야기였답니다. 「외투」는 국내에도 여러 번역본이 있는데, 제가 읽은 책은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고, 노에미 비야무사 작가님의 삽화가 더해진 특별한 판본이었어요.


이 책은 단순히 줄거리를 따라가는 독서를 넘어, 비야무사의 삽화를 '보고', 고골의 생생한 묘사를 '어루만지듯 느끼며' 아카키의 잃어버린 시절을 함께 찾아가는 경험이었습니다.

작은 존재감, 그러나 특별한 기쁨을 누리던 아카키


표지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주 뻣뻣한 외투 속에 왜소한 남자가 들어 있는 형상이지요. 마치 외투를 입은 것이 아니라, 외투 자체가 그를 감싸 안은 듯한 모습이에요. 이 남자의 이름은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바시마치킨', 9등 문관인 말단 직원입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상관들이 제공하는 각종 문서 초안을 반듯하게 필사하여 공문서로 만드는 필경사이지요. 그는 아무런 존재감 없이 이 일을 수행하는데, 때로 동료나 상관들의 조롱에도 개의치 않고 묵묵히 자기 일에 몰두하며 남몰래 보람을 느끼는 인물이었습니다.


"정서하는 일에서 그는 다채롭고 즐거운 자신만의 세계를 발견했다. 즐거움은 그의 얼굴에도 나타났다. 그는 몇몇 글자를 특별히 좋아했는데, 그 글자들을 발견하면 마음의 평정을 잃고 슬쩍 웃음을 짓기도 하고, 눈을 깜박이기도 하고, 입술을 움찔거리기도 했다. 그가 펜으로 무슨 글자를 쓰는지 그의 얼굴에서 모두 읽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한 벌의 외투가 건넨 '잃어버린 시절'의 희망


하지만 연봉 400루블의 박봉을 받는 그에게도 강력한 적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매서운 북쪽의 한파였습니다. 결국 낡을 대로 낡은 옷을 대신하여 150루블에 달하는 거금을 들여 새 외투를 장만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는데, 가령 저녁마다 좋아하던 차도 끊고, 매일 켜던 촛불도 켜지 않았으며, 심지어 필요할 때는 주인집 촛불 밑에서 일을 하는 지경에 이르지요.


하지만 새로 얻은 외투는 그에게 몸의 따뜻함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기분 좋은 변화'를 선물했습니다. 아카키에게 새 외투는 단순히 추위를 막는 옷이 아니라,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서 잃어버렸던 자신의 존재감, 어쩌면 찬란했을 시절의 일부를 잠시나마 되찾아 준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호사다마, 다시 빼앗긴 따스함과 존재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요. 얼마 뒤 회사의 상관이 초대한 연회에서 돌아오던 길에, 그는 강도를 만나 새로 산 외투를 빼앗기고 맙니다. 외투를 찾기 위해 경찰관과 고관을 찾아가 갖은 노력을 하지만, 그들의 무관심과 냉대에 결국 낙담하다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 비야무사 삽화본 『외투』의 진면목은 그가 외투를 찾기위해 호소하러 찾아갔던 고관이 호통을 치는 리얼한 모습이나, 결국 죽어 유령이 된 아카키가 칼린킨 다리에 유령으로 나타나 마치 다리와 조합된 듯한 기묘한 모습으로 그려진 장면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이는 문학동네 『외투』만이 가진 특별한 재미를 선사하지요.


가난하고 박봉이었지만 필경사로서 작은 행복을 느끼던 아카키에게, 새 외투는 단순히 추위를 막는 의복 그 이상이었습니다. 새 외투를 마련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한껏 달라진 아카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의복이 그에게 '자존감'과 내면에 잠재해 있던 '욕망'을 발현시켜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은의 '글쓰기', 가장 따뜻한 외투


문득 요즘 저에게 '외투'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요즘 제게 '외투'는 다름 아닌 '글쓰기'입니다. 브런치스토리에서 '책사냥꾼 유은'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올린 지 어느덧 두 달이 되어 갑니다. 그 사이 서른 편 남짓 게시했고, 감사하게도 따뜻한 반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카키의 새 외투처럼, 타인의 시선과 외형적 인정만으로 글쓰기를 바라본다면 머지않아 실망이 찾아올 것입니다. 구독자 수와 '좋아요'의 증가는 분명 즐겁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지 않도록 저는 오늘도 경계하고 또 경계합니다.


저의 글쓰기는 읽은 책을 정성껏 소개하고, 그 읽기의 감동을 전하는 일에서 출발했습니다. 브런치스토리에 참여하는 근본적인 이유, 즉 책을 통해 건네는 공감과 사유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숫자보다 문장을, 반응보다 독자님의 마음 한 조각을 더 바라보겠습니다. 그것이 지금 제게 주어진, 가장 따뜻한 '외투'이니까요.



<외투>가 건네는 마지막 질문


세상에는 수많은 외투가 있고,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외투를 찾아 헤맵니다. 저의 '글쓰기 외투'가 그러하듯, 혹독한 계절을 견뎌낼 수 있는 따뜻함은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를 감싸고, 저를 제가 되게 하는 그 묵묵한 힘이야말로 제가 오늘도 글을 쓰는 이유이자, 잃어버린 시절 속에서 제가 진정으로 찾아 헤맨 자아의 온전한 형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가장 따뜻한 외투'는 무엇인가요?




keyword
이전 05화페소아의 창문으로 본 리스본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