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2. 엄마 최고
그도 나도 워낙 고지식한 성격이라 연애에 있어서 성실함과 믿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우리는 재고 따지고 없이 불이 붙었다.
나이 서른에 남자친구에게 설레는 나에게 친구가 물었다.
"대체 어떤 남자길래 네가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릴까?"
연애를 시작할 때 그는 전기 기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말에 같이 서점에 가서 가장 크고 두꺼운 실전 문제집 한 권을 샀다. 이면지에 문제를 처음부터 하나씩 푸는 과정에서 맞게 풀었으면 문제집에 연필로 가볍게 맞기 표를, 틀리게 풀었다면 엑스를, 조금 모르겠다 싶으면 삼각형을 표시했다. 문제집 전체를 3~4번 정도는 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제집을 풀 때는 지우개로 표시를 지우면서 문제집을 풀었던 그는 아니나 다를까 시험을 한 번에 통과했다. 3번도 넘게 풀어낸 문제집은 완전 새 책 같았고 그 문제집을 다시 중고로 팔아버렸다. 그의 성격을 정말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시험 준비하는 그의 일상은 평일 퇴근하면 김밥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다시 회사에서 두어 시간 자격증 공부를 하고 집으로 갔다. 한 시간이 넘는 그의 퇴근길에 우리는 매일 통화했다. 주말에는 근교에 있는 카페에 가서 함께 공부하고 밥 먹고 산책했다. 그러다 보니 대화를 정말 많이 했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던지, 그가 사기꾼인줄 알았다. 통화를 길게 하는 것이 힘든 내가 매일 밤 전화기로 그와 대화를 하고 있었으니. 그리고 하는 말마다 수긍하고 공감해 주는 그가 영 미심쩍었다. 지금 같이 살아보니까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고, 나에게 정말 잘 맞는 사람이었다.
시험공부를 하던 연애 초창기에 그는 나에게 가족사를 이야기했다.
아빠의 사업이 부도가 나서 빚이 있었고, 협박을 받아 가족 모두 보증을 쓰게 되면서 그의 이름 앞으로 하루아침에 빚이 5억이 생겼다.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과 맞서 싸우고, 변호사 상담을 받으면서 상황을 정리해 나간 이야기를 덤덤하게 말을 하는 그에게 나는 너무 놀랐다. 또래보다 조금 성숙한 사람이라고 나는 나를 평가해 왔지만 두 살 어린 그에게 나는 어떠한 위로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잘못인 듯, 이러한 자기를 계속해서 만날 수 있냐고 나에게 물었다. 힘든 일이 일어났고 불가피한 상황이었지만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나의 대답을 듣고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잠깐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했다.
만난 지 3개월이 되어가던 시점에 아버지 생신을 맞이하여 엄마가 그를 집으로 초대하려고 했다. 아무리 우리가 뜨겁게 연애를 하고 있다지만, 이제 3개월 만난 사이에 가족행사에 초대하는 건 부담스러웠다. 발악하는 나에게 말이 통하지 않자 엄마는 그에게 작업을 걸기 시작했다.
그: 어머님이 나보고 얘기해 보라는데, 나는 네 의견에 따른다고 말씀드렸어.
나: 나는 부담스러워. 너무 이른 것 같아.
그: 그럼 다음에 방문하는 걸로 내가 어머님께 잘 말씀드릴게.
나: 너는 어떤 생각인데? 넌 부담스럽지 않아?
그: 나도 부담스럽지... 나는 사람이 중요해, 그 사람이 너라는 사람이고. 네 집에 방문하는 건 이번에 가느냐, 나중에 가느냐인 것이지, 첫 방문은 변함없이 부담스러운 일이지.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
나: (이번에 가나 나중에 가나?) 그런가?
돌이켜 생각하니 말려든 기분이다.
그렇게 연애한 지 3개월도 안 되어 나의 가족을 만났고, 연애 6개월 후 양가 가족에게 통보를 하고 우리는 동거를 시작했다. 동거 9개월 후 우리는 양가 가족에게 또 한 번의 통보를 하고 혼인신고를 했다. (물론 두 번 모두 반대 없이 우리의 판단을 믿어주신 두 가족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혼인신고 한지 정확히 일 년 후 결혼식을 올렸다. 그와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결정인만큼 우리 둘이 충분히 대화를 하고 합의를 하며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나는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 결혼식을 올린 지도 6개월이 지난 지금, 여전히 우리는 대화를 가장 많이 나누고 함께 있으면 가장 재밌다.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연애 3개월도 안 되는 데 왜 집으로 초대한 거야?"
"그렇게 밖에 안 됐어? 나는 매일 보고 오래 봤으니 네들도 오래 만난 줄 알았지."
엄마는 생각이 많은 두 사람이 서로를 놓칠까 봐, 부모로 한 번 밀어붙여보았다고 하셨다. 엄마에게 생명을 받은 것도 감사하지만, 배우자까지 콕 집어내고 밀어붙여주시다니,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다.
역시 우리 엄마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