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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Mar 01. 2020

그저 지독하게 사랑하는 존재일 뿐

아주 신선한 우주로의 여행,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코로나19' 덕에 주말 내내 종일 집콕하며 하는 일은 소설책 여러 권을 붙잡고 뒹구르르, 몸을 비비 꼬는 일.


겨울 한낮, 나의 아름다운 방구석, 어쩌면 코로나 때문에...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사실 소설이 잘 읽히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소설에 빠질 만한 감수성이 팔딱 거려야 나와 다른 텍스트 속 낯선 인물의 삶 속으로 비로소 개입된다.


   시간도 필수적이다. 한 두 장 읽다 끝나는 게 아니라 스토리로 이어진다. 중간에 멈추기 쉽지 않다. 정보를 얻기 위한 게 아니라 이야기 속에 그저 풍덩 빠지는 일. 몇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비로소 읽히곤 했기에, 한동안 읽을 수 없었다.


   근래 몇 권의 소설들을 소개 받거나 선물 받게 됐다. 기쁘지만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몇 권의 책 속엔 몇 십명의 사람들이 있다. 몇 백 가지의 저마다 다른 상황들, 갈등도 존재한다. 그러니까 소설을 읽는 다는 건 누군가의 삶을, 그 거대한 우주를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 일종의 중압감과 기대감이 뒤섞이는 일. 간만에 작정하고 들어선 이 우주 여행 덕에 코로나로 물렁이던 하루가 단단해졌다. 소설 속 여러 우주들을 비행하느라 숨이 가쁘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동성애의 사랑을 다룬 소설이다. (---이 따위 한 문장으로 소설을 정리하는 게 맞는지 지금 이 순간에도 의문/죄책감이 들지만.)


   읽는 내내 여러 차례 킥킥 빵 터지는 위트있는 소설이다. 누구든 빠져들 수 있다. 그렇지만 마냥 쉬운 소설은 아니다.  


  ‘법’이 더해진 제목을 보고는 어쩌면 사랑이 무얼지 해답을 얻을 줄 알았던 나는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꼈으니까. 호기심이 오히려 더 큰 의문과 함께 다가와서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누군가의 사랑들을 섬세하게 그려냈지만, 유독 그 사랑의 종류가 낯설고 어렵다는 생각에 몰입이 어려웠다.


   다만, 책을 덮을 즈음엔 영락없이 기권했다. 결국은 나도 편견 어린 세계관 속에 서식하고 있었구나 자각했다. 주인공의 특성부터 이해되지 않아 첫 장을 여러차례 반복해 읽을 땐 스스로가 위선적으로 느껴지기 까지 했다. 상상력이나 감수성이 얼마나 결여돼 있었던 걸까.


   그러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야 비로소 바라볼 수 있던 건, 이 책이 말하고 싶었던 핵심에 대한 것이었다. ‘대도시’의 사랑도 아니고, 사랑의 ‘법칙’도 아니고, 그냥 “사랑”. 바로 그 것.

 

  대도시든 시골이든 사랑이란 단어와 감정이 주는 애달픔과 슬픔, 환희와 기쁨들...

  그런 것들은 결국 성별, 나이, 인종, 모든 것과는 관계 없이 '동일'하게 타오르고, 저마다의 속살은 그리하여 더욱 깊고 묵직할 뿐이다.


  무엇이 옳고 그름이 있을 자리가 있기나 할까. 그저 모두가 누군갈 지독하게 사랑하는 존재인 것을. 사랑에 타오르고 사랑에 구원 받고, 사랑 때문에 좌절하고 울고 웃는.


  이 소설 하나로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쉽게 확언한다면, 그것 또한 위선일 것이다. 허나 우리 모두가 그야말로 ‘어쩔 줄 모르는 사랑’이라는 걸 동일하게 경험하며 지금 이 순간을 부여잡고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된 것만으로, 꽤 가치 있는 경험이었다.


  낯설다는 이유로 묵혀두기엔 참으로 섬세하고 재밌게 다가온 '아주' 신선한 우주.

  코로나로 지루한 하루를 이기는 데 제법인 소설이었다. ●



그렇게 지독하게 누군갈 사랑하고 애달파할 그 뿐. 우리 '모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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