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의 안과 밖을 가르는 권력관계
살로메: 아! 난 너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요한. 난 너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너의 입술 위엔 매운 맛이 있었구나. 그건 피 맛이었나. 그러나 아마 그건 사랑의 맛일 거야. 사랑의 맛은 맵다고들 하는데--- 그러나 무슨 상관이야? 난 너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요한. 난 너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헤롯왕: 이 계집을 죽여라!
(병정들이 달려들어 유대의 공주 에로디아스의 딸 살로메를 방패로 눌러 죽인다.)
-오스카 와일드, <살로메> 中
팜므파탈, 그 치명적인 아름다움
호랑이 가죽을 깐 호화로운 침상에 한 여자가 앉아있다. 금허리띠로 두른 치마 속으로 드러나는 늘씬한 몸매가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백옥처럼 하얀 몸과 대비되는 어두운 얼굴에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 떠있는데, 내리깐 시선이 향하는 곳은 그녀의 왼손으로 짓누르고 있는 한 남자의 목이다.
이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여자는 헤롯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었을 때 옆에 있었던 그의 의붓딸이다. 사실 그녀는 옆에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헤롯왕이 요한의 목을 베도록 사주한 장본인이다. 헤롯왕의 앞에서 춤을 춰서 그를 홀리고는, 소원으로 당시 감옥에 갇혀있었던 요한의 '목'을 달라고 했다고...... 이 일화의 원본 격인 성서에는 그녀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데, 어떤 역사가가 그녀의 이름을 '살로메'라고 기록하면서 이름을 알리게 됐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살로메>라는 희곡을 쓰면서 희대의 악녀이자 요부로 그 명성을 떨친다.
팜므파탈(femme-fatal)은 말을 그대로 풀이하자면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위험한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동양의 표현으로 초월번역하면 '경국지색' 정도가 되려나? 수많은 남성들을 사로잡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여자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위험하게 여겨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중국의 양귀비,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조선의 어우동...
그 중 살로메는 가장 오래된 팜므파탈 중 한 명이자, 가장 그 의미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여성상이 아닌가 싶다. 노골적인 섹시댄스(!)로 양아버지를 유혹하고, 세례자 요한의 잘린 머리에 키스를 날리는 그로테스크함까지 갖췄으니까!
왜 그녀들은 아름다워졌는가
여기 또다른 여자가 있다. 아니, 사실 그냥 여자는 아니고 반인반수의 괴물인데, 바로 여행자를 붙잡아 수수께끼를 내고 답을 맞추지 못하면 잡아먹는다는 '스핑크스'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새의 날개와 사자의 하반신을 가지고 있다는데, 슈투크는 흥미롭게도 그냥 인간 여자로 그렸다. 붉은 벨벳 위에 사자처럼 엎드리고 가슴을 핀 그녀의 자세는 영락없는 신화 속 스핑크스지만, 솔직히 나는 이 스핑크스가 무섭기보다는 섹시하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스핑크스는 원래 이렇게 예쁘지 않았다. 사실 예쁠 '필요'가 없다. 미모로 여행객을 홀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길 막고 있다가 문제 못 맞추면 잡아먹으면 되는데 굳이 예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이 그림을 그린 프란츠 폰 슈투크는 20세기의 상징주의 화가로, 여성을 많이 그렸다. 그의 그림 속 여성상은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그려졌다. 아담을 유혹하는 음탕하고 사악한 최초의 여성 릴리트, 그리스로마신화 속 마녀 키르케... 그리고 이 여인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게 그려졌다. 그 이유는 아마 슈투크가 생각하기에 여성들의 가장 주요한 무기가 남성을 홀리는 빼어난 미모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 프란츠 폰 슈투크가 그림을 그렸던 20세기 초반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페미니즘이 막 태동하던 1900년대 초에는 여성의 참정권에 대한 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기이다. 이 시기 남성들은 여성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어떤 이들은 낯섦을 넘어서서 불쾌한 감정까지 느꼈을 지도 모른다. 2등시민인 여성들이 참정권을 갖지 못한 건 고대 그리스부터 너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런 남성들의 불쾌감이 담겨있는 게 바로 팜므파탈과 아름다운 마녀의 도상들이다.
미녀 스핑크스 그림은 우리의 무의식에 이렇게 속삭이고 있다. 남성이 여성에게 굴복하게 되는 요소는 바로 성적 매력이고, 한 발 더 나아가 과격하게 해석하자면 바로 그것만이 여자가 남자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라고. 바로 여기 죽음의 키스를 선사하는 스핑크스에게 무릎을 꿇은 남성은, 그녀의 지식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성적 유혹에 패배한 것이라고. 이렇게 남자보다 똑똑한 여자, 너무 똑똑해서 평범한 남자는 풀 수도 없는 문제를 내는 스핑크스는 빼어난 미모로 남자를 유혹하는 치명적인 여자로 탈바꿈했다.
가장 무서운 건 보이지 않는다
"그림의 권력은 보여지는 쪽이 아닌, 보는 쪽에 부여되어 있다." 미술사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림의 대상이 되는 쪽은 화가의 붓끝에 좌지우지되는 오브제로 권력관계의 '을'이고, 그림을 감상하는 쪽은 그 그림의 대상을 평가할 수 있는 '갑'이라는 뜻이다.
사실 현실이 그렇다. 살로메와 스핑크스는 정말 남자를 공포에 떨게 한 여인들일까? 스핑크스는 영웅 오이디푸스에 의해 죽음을 맞고, 살로메는 결국 헤롯왕의 손에 죽는다. 진정한 흑막은 캔버스 뒤에 숨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고, 진짜 권력은 이 그림을 감상하는 살롱의 평론가 집단에게 있다. 살로메와 스핑크스를 아름다운 괴물로 만들어서 무서워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그 매혹을 누드화로 만들어 눈으로 즐기고 소비하는 수많은 눈들! 권력은 바로 이 눈들에게 있다.
팜므 파탈은 부도덕하고 두려워해야 할 존재로 여겨졌지만,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주제였기 때문에 많은 화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위험해 보이지만, 언제까지나 안전하게 그림의 소재로 다룰 수 있었던 이야기들은 아름다운 그림이 되었다. 오리엔탈리즘 하에서 낭만화 되었던 신비롭지만 미개한 동양처럼. 아름답지만 치명적으로 위험한 마녀들처럼. 살로메처럼. 스핑크스처럼. 그림의 오브제가 된 이상, 살로메나 스핑크스는 실체 없는 괴담에 불과한 것이다.
진짜 위험한 권력들은 그림이 되더라도 비밀스럽게 소비되곤 했다. 풍자화가 신문에 당당히 걸리게 된건 굉장히 최근의 일이니 말이다. 그에 반해 살로메와 스핑크스의 일화는 많은 화가들에 의해 재해석 되었다. 특히 살로메의 그림은 관능적 여성의 누드화가 되어 탐미적 평론가, 화가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남자를 공포에 떨게 한 여인의 이미지가 바로 남성으로부터 탄생했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로 돌아가보자.
살로메의 키스는 요한에게 내린 죽음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죽음을 부르는 입맞춤이기도 했다. 그 그로테스크한 장면에 경악한 헤롯왕이 그녀를 죽이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헤롯왕은 분명히 살로메의 춤에 홀려 요한을 죽였는데, 바로 직후에 가차없이 그녀에게 죽음을 선고하니 말이다. 이게 정말 '홀린' 사람의 태도인가? 오히려 편리하게 원망할 대상을 던져주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유혹에 넘어간 연약한 남성을 연기한 것 아닌가? 이 이야기에서 헤롯왕은 정말 살로메에게 이용당한 걸까? 아니면 기꺼이 살로메에게 이용 당해준걸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인 것 같다. 원래 진짜 권력은 잘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