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교보문고 [문장수집], DIY 책갈피 만들기
어제는 오랜만에 귀국한 친구랑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유학을 떠난 후 종종 서울의 종로를 그리워하는 친구를 위해 광화문에서 만나기로 했다. 언제나처럼 약속장소는 교보문고. 나는 종로에서 사람 만날 일이 있을 때면 웬만하면 교보문고에서 만나자고 한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지, 앉을 자리 많지, 하릴없이 들어가 있어도 눈치볼 일 없지. 얼마나 좋은 장소인가. 무엇보다도 누구 하나가 약속에 늦어도 시간 때울 구경거리들이 많아 좀처럼 화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 최고의 장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나 하나뿐은 아닌 모양인지 교보문고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들 한 무더기는 갈 때마다 보이는 것 같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나 역시 서성이는 무리에 끼어 어슬렁 거리고 있었는데, 옆에서 재미있는 팻말을 발견했다. "문장수집". 꽤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어서 호기심에 기웃거렸는데 뭔진 몰라도 공짜란다. 음, 공짜 좋지. 그래서 나도 쪼르르 줄을 서 보았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에는 80종류가 훌쩍 넘는 종잇장들이 펀칭 되어 벽에 박혀 있었다. 캐치프레이즈는 "마음을 두드리는 책 속 한 문장, 당신의 문장을 골라 책 속에 간직하세요." 예쁜 문장 수십개를 빳빳한 종이에 곱게 인쇄한 종이 책갈피를 나눠주는 행사였다. 수많은 문장들 중에 마음에 드는 글귀가 적힌 책갈피를 골라 가져갈 수 있었다. 펀치 구멍이 뚫린 종이에 자기가 좋아하는 색 리본을 달고, 스탬프까지 찍으면 완성되는 이른바 DIY 책갈피였다. 책도 잘 읽지 않으면서 책갈피는 왜 이렇게 볼 때마다 갖고 싶어지는지 모르겠다. 너무너무 예쁜 문장들에 홀려 열심히 고르느라 사진 찍는 걸 깜빡했다... 대신 문장수집 이벤트를 잘 소개해주시고 있는 블로그 글을 링크!
한 가지 아쉬웠던 건 DIY의 매력인 '나만의' 책갈피 느낌이 잘 살지 않았다는 점이다. 똑같은 용지에 스탬프 몇 종류를 비슷한 위치에 찍으면 옆의 사람 것이나 내 것이나 별 차이가 없다. 심지어 이벤트를 시작한지 시간이 꽤 지났는지 스탬프가 잘 찍히지 않았고 리본도 두 가지 색밖에 없었다ㅠㅠ 주옥같은 문장들이 너무 아까워서 리본만 묶은 빈 책갈피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명색이 문장수집인데, 제대로 수집해서 정말 나만의 책갈피를 만들어 봐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펜과 팔레트를 꺼냈다. 마침 책갈피에 스탬프를 찍기 위한 빈 공간이 많아서 여기에 도장 대신 그림을 그리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나무를 좋아한다. 제 마음대로 뻗은 가지의 길이나 굵기는 나무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특징들이다. 비슷한 의미에서 나무를 그리면 그린 사람의 마음이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아서 나무 그리기를 특별히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내게 나무 그림은 자기 표현적 의미를 갖는 것 같다. 고등학생 때부터 유난히 나무를 많이 그렸던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내가 고등학생 때 그렸던 나무와 지금의 나무 그림은 차이가 제법 많이 난다. "우리는 자기 자신 외에 그 무엇도 될 수 없고, 될 필요도 없다." 이 문구를 읽자마자 나는 나무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무 줄기를 그리고 나서 뭔가 비대칭적인 모양에 아차 싶었는데, 이파리를 총총히 달아주니 그래도 전체적으로 그럴싸한 나무가 되었다. 뼈대는 뭔가 어설프지만, 피어낸 잎사귀들까지 두고 보면 제법 봐줄만한 꼴이 되는 나무 한 그루. 그게 바로 지금의 내 모습인 것 같아서 더 정이 가는 그림이 되었다. 나무 하나 그리고 나니 허전해서 위쪽에 괜한 붓질도 몇 번 해봤다.
앗, 이 친구는 그리기 전에 찍는 걸 깜박했네. "난 살아오면서 오판에 오판을 거듭했다. 그게 내 삶이 개선된 이유다." 오판에 오판을 거듭하면서 삶이 나아진다면, 한 번의 옳은 선택보다는 틀리더라도 다양한 시도가 중요한 것 아닐까? 그래서 손 가는 대로 여러 식물들을 그려보았다. 쑥쓰러운 실수 투성이더라도 그릴 수록 나아지는 게 그림이고, 잘못된 길에 들어서도 돌아가고 계속 나아감으로써 나아지는 게 인생이다.
전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상상유니브 프로그램에서 여행드로잉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수업에서 배운 몇 가지 잔재주는 두고두고 잘 써먹고 있다. 아무래도 '여행' 컨셉이다 보니 자연 풍경 속 식물드로잉을 많이 했는데, 그 때 선생님이 보여주신 문양들이 예뻐서 손에 잘 익혀두었던 기억이 난다. 꽃을 너무 입체적으로 표현하려고 애쓰지 않고 도안처럼 찍은 듯한 평면적 모양을 만들어보는 게 포인트. 선화를 다 그리고나서는 펜선에 붓이 닿지 않게 조심하면서 색칠했다. 비슷한 색조로 칠해야 예쁠 것 같아서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계열로 통일했다.
짠! 세상에 둘도 없는 책갈피가 완성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실물이 더 예쁘다. 이제야 정말 제대로 문장을 수집한 기분이다. 다른 작가의 근사한 문장 아래에 그림을 그려서 보란듯이 책갈피로 만들어 놓으니, 어쩐지 문장을 수집한 게 아니라 '훔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문장을 훔쳐낸다는 표현이 수집한다는 표현보다 더 마음에 든다. 수집은 고상하고 정적인 취미 같지만, 훔쳤다고 하면 뭐랄까, 조금 더 두근거리는 기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고 정말 나만 간직하고 싶은 좋은 문장을 만났을 때, 나는 문장을 수집했다기보다 훔쳤다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작가들도 자신이 겨우겨우 생각해낸 기발한 문장을 다른 사람들이 쉽게 인용해 쓰는 걸 지켜볼 때는 왠지 억울하고 도둑맞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장수집 이벤트에서 만난 몇 가지 문장은 적반하장으로 내가 도둑맞은 기분이 들었다. '이건 정말 나만 알고 있고 싶었던 문장인데! 이제 사람들 다 알겠네!!' 하는 이상한 마음이다. 하지만 나도 새로운 문장 몇 개를 도둑질(?)할 수 있었으니 비긴 걸로 치려고 한다. 덕분에 예쁜 책갈피도 얻었으니 이긴 셈이지 뭐.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갔다가 뜻밖의 수익을 얻었다. 역시 다음에도 약속 장소는 광화문 교보문고로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