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전교생이 단체로 MBTI 성격검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 친구들끼리 검사결과지를 돌려보면서 서로의 MBTI 유형을 맞추는 게임을 했었다. 개중에는 누가봐도 성격이 분명하게 갈리는 친구가 있는 반면 경계선에 있는 듯해서 의견이 분분한 친구도 있었는데, 나는 둘다 아니었다.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내 유형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주 정반대의 확신을 가지곤 했다. 이런식으로: "너는 누가봐도 외향형이지. 감성적인 타입일 거고." "내가 장담하는데 넌 100퍼 내향형에 냉철한 논리형이다!" 친구들이 내 유형을 놓고 자기들끼리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렇게까지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엇갈릴 수 있나' 싶어 스스로의 행적을 되돌아보곤 했었다.
나다운 것이란 뭘까? 스무해를 훌쩍 넘게 살아왔지만 지금껏 그 답을 찾지 못했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상대에게 잘 맞춰주는 사람이었다. 학창시절 나는 성격이 불같고 극단적인 사람들의 '유일한 친구' 타이틀을 따곤 했었다. 그 타이틀을 선사해준 여러 인물들 중에는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받는 중학교 동창이 있는데 그 친구는 여차하면 책상도 아니고 교탁(!)을 엎을 정도로 성격이 만만찮은 친구였다. 당시 우리의 별명은 '물불가리지 않고'의 '물불'이었다. 물론 그 친구가 불, 내가 물. 내 친구는 적도 많았지만 그만큼 카리스마도 있어서 인기가 좋았다. 반에서도 그 친구가 회장을 맡았고 나는 부회장이었다. 그가 눈에 띄는 일을 벌이면 나는 뒤에서 수습하는 역할이었다. 말 그대로 불 꺼주는 물, 그것도 순 맹물이었다. 그 시절 나는 내가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특별함'에 대한 동경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했었고, 누구나 입을 모아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지!"라고 말하는 색깔있는 사람들의 존재감을 탐냈다. 학창시절에는 무용이나 음악을 전공한다며 머리를 기르고 다니던 예고 준비생들, 학교 축제에서 공연을 하던 밴드 동아리, 좀더 커서는 술자리에 없으면 티가 나서 꼭 부르는 분위기메이커들을 부러워했다. 조용한 범생이로 자라 조직에 분란 일으키지 않고 잘 웃는 평범한 직장인1이 된 나와는 종족부터 다른 사람 같았다.
평범한 직장인1. 나는 그 평범성을 싫어했다. 그래서 공무원이 되기를 그렇게 오랫동안 망설였는지도 모르겠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평범하고 무난하며 재미없는 삶의 상징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재고 따진 끝에 공무원이 되어버린 나는 한 가지 작은 목표를 갖게 되었다. '당신은 공무원답지 않네요'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래서 평범하고 무난한 공무원이 아니라 톡톡 튀고 특별한 공무원이 되어야지. 내 야무진 목표에도 불구하고 본성은 어딜 가지 못해서 아직까지는 그런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어쩌면 내 평생은 나의 본질에서 멀어지기 위한 사투였을지도 모르겠다. 두발규정이 엄격한 학교에서 머리를 기르고 치마를 줄이던 학생들을 내심 부러워했던 조용한 범생이는 단 한 번도 무릎 위로 올라오는 치마를 입어본 적이 없었다. 술자리 분위기메이커를 부러워했지만 정작 나는 중앙테이블보다는 구석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편을 선호했다. 공무원답고 싶지 않았던 공무원이었지만 지금도 우리 직장에 아주 잘 어울린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훨씬 많이 듣는다. 나는 평생 나다운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끝내 '나다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브런치 공모전에서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이 주제로 나왔을 때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나를 나답게 하는 것에 대해 고민해본 적도, 그럴 필요성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일단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생각해봤다. 좋아하는 것의 목록은 한바닥 나왔는데, 싫어하는 것은 오히려 잘 떠오르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도 열렬히 좋아하는 건 딱히 없어서 그중 어느 무언가가 나를 정의한다고 하기엔 부족해보였다. 내 진짜 성격이 어떨까 궁금해서 MBTI 검사도 다시 해봤는데 다 어중간한 점수(4가지 기준 모두 50퍼센트 대였다)가 나왔다.기분 나쁜 심리테스트로 불리는 에고그램도 해봤다. 결과는 마치 짠것처럼 BBBBB. 이름조차 중용타입... 칭찬할 것도 없지만 욕먹을 일도 없는 타입이라는 설명을 본 순간 뼈를 맞았다.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평범한 성격이었다. 나는 여전히 밍숭맹숭한 물이었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확인하게 되니 괜히 우울해졌다. 나다운 게 뭔지 열심히 찾아왔는데 목적지엔 텅 빈 공백만 있는 기분이었다.
스스로의 밍숭맹숭한 성격을 곱씹던 중, 오랜만에 '물'같다는 소리를 또 들었다. '맹물' 중학생 시절 이후로 간만에 듣는 별명이라 씁쓸하면서도 반가웠다. 자주 들었던 소리라고, 내가 좀 맹탕같다고 대답하면서 웃었더니 상대방이 깜짝 놀라면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에게 굉장히 동화가 잘 된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어떤 그릇에 담아도 물은 형태를 맞춰주잖아요. 청연씨가 그래요, 어떤 그릇에도 자신을 맞출 수 있는 흐르는 물 같아요. 그래서 자유롭고 유연하게 어디에서든 적응 잘할 것 같다는 뜻이었어요."예상치 못한 칭찬에 당황해서 감사하다고 얼버무렸다.평범함이 유연한 적응력으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놀라울 정도의 평범한 성격은 도리어 특별함이 될 수 있었다. 그러고보면 MBTI 검사에서 양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 친구들은 많았다. 하지만 내 성격에 대해서만 유난히 친구들이 저마다 다른 종류의 확신을 가졌던 건, 어쩌면 내가 다양한 모습의 나를 친구에 따라 다르게 보여줬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평범하고 무난해서 흰 도화지 같은 성격은 그 자체로는 아무색도 아니지만 동시에 그 어떤 색깔도 담을 수 있어서 가장 다양한 색깔일 수도 있다. 평범함이 바로 내가 가진 특별함이자 가장 나다운 모습이었다.
나는 더이상 특별해지려 노력하지 않기로, 그저 생긴대로 물처럼 고요히 흘러가기로 했다. 이제는굳이 그릇에 몸맞추는 자신을 거부하고 별모양이 되어보겠다 노력하지도 않을 거다. 그건 마치 손틈 사이로 흐르는 물을 막아보겠다고 덤비는 것처럼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해서도 안될 일이었다.공무원이 공무원다운게, 내가 나다운게 뭐가 잘못이라고 그렇게 오랫동안 사투를 벌였는지 모르겠다. 그걸 인정하고 나니 딱 맞는 옷을 찾아 입은 것처럼 편안해졌다. 결국 나를 나답게 할 수 있는 건 바로 나 자신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결론은 내가 결국 특별함을 동경하지 않게 되었다는 거다. 특별함을 찾아 떠났던 평생의 여정을 이렇게 의외의 순간에 마무리하게 될줄은 몰랐다. 그것도 나다움이라는 가장 평범한 원점에서. 소박한 마무리지만, 김수현 작가의 말을 빌려 여정의 끝을 장식해보려한다. 일전에 교보문고에서 나눠주던 무료 책갈피에서 이 글귀를 발견하고 훔쳐내듯 간직했었는데, 그 뜻이이제야 분명히 다가오는 것 같다.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평범함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원점에서 다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겠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평범하게.
"우리는 자기 자신 외에 그 무엇도 될 수 없고, 될 필요도 없다." - 김수현,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