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휘가 나가자 오빠가 화장실과 거실을 부산스럽게 오갔다. 얼굴이 굳고 구시렁구시렁 혼잣말도 했다. 시간을 관통하는 기시감에 미영은 가슴이 벌렁거렸다. 세월은 가도 사람은 그대로였다. 못죽을 끓일 참이구나.
스웨덴 민담 ‘나그네의 못죽’은 쉴 곳을 찾던 나그네가 혼자 사는 할머니에게 하룻밤 재워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인색한 할머니는 자기 집이 여관이 아니고 쌀 한 톨도 없다며 거절하지만 나그네는 계속 매달린다. 할 수 없이 할머니는 그를 안으로 들이는데 마루에 자게 하고 먹을 것도 주지 않는다. 나그네는 냄비를 빌려달라고 해서 긴 대못을 꺼내 냄비에 넣는다. 궁금해하는 할머니에게 못으로 죽을 끓일 수 있다며 관심을 끈 다음 죽이 약간 묽을 거 같으니 밀가루를 한 줌 달라고 한다. 밀가루를 넣고 젓던 나그네는 이제 소고기와 감자, 보리와 우유를 청한다. 할머니의 마음을 움직인 나그네는 못을 꺼낸 뒤 최고급 죽이 만들어졌다며 식탁보와 술과 샌드위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할머니는 술은 물론 송아지 고기와 버터까지 차려 우아하고 맛있게 식사한다. 그날 밤 나그네에게 침대를 내주는 건 물론 다음날 노잣돈으로 금화까지 내놓는다……
“아직도 이런 걸 보냐? 유치원 선생이라 그런가? 근데 민미영, 요즘 이 동네 시세가 좋다며? 재개발된다던데.”
거실 책꽂이에서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한 권 빼든 모양이다. 미영이 앉은 식탁까지 다섯 걸음밖에 되지 않은데도 음성이 컸다. 낚싯줄을 던지듯 무심하게 던지는 것 같으나 치밀하게 계산된 말이었다. 미영은 못 들은 척 개수대 물을 틀었다. 조금 전까지 다정한 도구였던 컵과 접시를 씻는데 신경은 온통 뒤쪽에 쏠렸다. 그릇 부딪치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에도 발걸음 소리는 섞이지 않고 뚜렷이 들렸다. 3, 2, 1. 땡. 아니나 다를까, 오빠가 미영의 어깨를 그악스럽게 잡았다.
“민미영, 여기 앉아 봐. 할 말 있어.”
미영이 수돗물을 잠그고 느릿느릿 손을 닦았다. 눈을 감았다 뜨고 깊이 들이켠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몸과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기분이 들자 걸음을 옮겼다. 미영이 식탁 의자에 앉자마자 오빠는 그 어렵다는 조경사 자격증을 단번에 땄다는 자랑부터 했다. 이야기는 이팝나무, 배롱나무를 거쳐 나무 농사, 조경사업을 넘나들고 코로나, 친구 배신을 거쳐 돈 빌려달라는 것으로 끝났다.
“공사 대금 받는 대로 갚을게. 가지고 있는 대로 융통해 주라.”
미영은 치밀어오르는 화를 뱃속 깊이로 내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없어.”
“야, 내가 널 모르는 것도 아니고, 월급 착착 모았을 거 아냐?”
미영은 참았던 숨을 훅 내뱉으며 눈을 부릅떴다.
“이 집 넘겨받을 때 대출 낸 돈 아직 갚는 중이야. 벌써 잊었어?”
“집, 그렇지, 그 말 잘 꺼냈다. 그 사이 1억 넘게 뛰었더라. 내 거 받아 벌었으니 그만큼 내놓으면 되겠다. 아이, 얘가 왜 이래?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빌려 달라는데 눈에 쌍심지를 켜야겠어?”
말이 점점 거칠어졌다. 하지만 미영도 예전 미영이 아니다. 어영부영 당할 수 없고 당할 돈도 없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전세금 날리고 쫓겨날 뻔한 거 잊었어? 세입자 우선 권리로 경매받을 때, 그 돈 어디서 나왔는지 벌써 잊었냐고.”
“아이고, 민미영, 내 동생님, 많이 똑똑해졌다. 그러면 이 집 명의가 아직 나인 것도 알겠네? 아닌 말로 내가 나가라면 넌 나가야 해.”
“하나도, 하나도 안 변했어. 몇 년 만에 나타나 고작 한다는 말이……”
“아이 씨, 그래서 못 해준다는 거야? 참 세상 불공평하고 하늘도 무심해. 제 아버지 죽인 년은 가만있어도 돈이 붙고 조상 제사 꼬박꼬박 지내는 놈은 하는 일마다 어그러지니. 야, 그때 네가 준 약 먹고 아버지가……”
그 순간 미영이 식탁 위에 놓인 티슈 곽, 매일 아침 한꺼번에 삼키는 약들을 집어 던졌다. 벌떡 일어서며 오빠를 노려보았다. 바락바락 악을 썼다.
“또, 또, 그 얘기. 평생 써먹고도 아직 남았어? 나 때문에 죽었으면 그때 감옥에 보냈어야지.”
엉겁결에 뒷걸음질 쳤던 오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40년 동안 갇혀 있었던 미영의 봇물은 터진 둑을 넘어 거침없이 내달렸다.
“때리고 술주정만 하는 인간이 죽어서, 엄마도, 너도, 좋다고 했잖아. 내가 어떻게 해야 했어? 이년 저년 하면서 진통제 달라는데 쬐끄만 애가 버텨낼 재간 있어? 그 약, 서랍 안에 있다고 누가 말했어? 오빠가, 네가 그랬잖아.”
“얘가 왜 이래, 혼자 살더니 미쳤구나. 콱……”
미영은 주먹을 올리며 다가오는 오빠 가슴을 먼저 밀었다. 오빠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둘둘 말린 테이프 같은 살덩이로 계속 밀어붙였다. 오빠는 어어 하면서 현관문 밖으로 내몰렸고 미영은 현관문 안쪽에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란 힘이 바닥으로 흘러내려 그림자처럼 깔렸다. 미영은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집안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세상이 닫힐 줄 알았는데 미영의 세계는 그대로 있었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괴상한 소리가 미영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