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흔적과 지난 기억들
K의 남자 친구는 K의 눈치를 살피더니 소주를 시켰다. 나는 집게와 가위를 뺏어 들고 고기를 구웠다. 두꺼운 고기 한 덩이를 철판에 올리자 흰 연기가 요란하게 피어났다. K는 젓가락 끝을 물고 아직 굽고 있는 고기를 간절하게 바라봤다. 배가 고플 만도 했다. 점심을 1시에 먹었는데 퇴근은 7시니 꽤나 출출하겠지.
“만약에 대표가 잡으면 잡힐 거야?”
이상한 소리를 했다. 이 대표는 사람을 절대 잡지 않는다. 나가겠다는 사람은 결국 나가기 마련이라며 자신은 절대 나가겠다는 사람을 잡지 않는다고 자신 입으로 직접 말한 적이 있다. 생각해보니 안 된다는 답이 온 것부터 어딘가 꺼림칙했다. 아, 진짜 잡으면 어떡하지.
“그냥 잡지는 않을 거야. 딜을 하겠지.”
“월급을 올려준다고 해도 월급을 못 받는다면 올려 받은 보람이 없어. 나 지금은 우선 쉬고 싶어. 혹시라도 내게 한 달 쉬고 돌아오라 하면... 잡힐 수도 있지.”
그럴 리 없었다. 지금 당장 에디터 다섯이 잡지 두 권 만들기도 벅찬데 한 명이 무급이든 유급이든 쉰다고 한다면 나머지 에디터들에게 못할 짓이었다. 대표라면 그 정도의 판단은 당연히 하고 있을 거다. 표면에 핏물이 고인 고기를 뒤집었다. 노릇하게 구워진 면이 드러나고, 다시 흰 연기가 요란하게 피어났다. 고기 굽는 냄새에 침이 고였다. K의 남자 친구와 내 소주잔에는 소주를, K의 소주잔에는 사이다를 따랐다. 우리 셋은 천장부터 테이블 가까이 내려온 환기구를 피해 잔을 부딪혔다. K의 잔에만 기포가 올라왔다. 거참, 귀여운 기포일세.
K의 남자 친구는 술을 마신다는 표현보다는 털어 넣는다는 표현이 걸맞게 마신다. 알약을 삼키듯 한 번에 털어놓고 맛을 느끼기 전에 삼킨다. '자, 술 들어간다. 목구멍을 열어라!' 같은 느낌이랄까.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고기를 가위로 잘랐다. 고기를 결에 맞춰 자르면 육즙이 밖으로 나오지 않아 먹을 때 고기 맛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이건 P가 알려준 방법인데, 대학시절 아르바이트하던 공장의 직원들이 회식자리에서 알려준 꿀팁이랜다. 기분 탓인지 확실히 육즙이 가득해서 맛이 좋다. 자르고 또 자르는데 K의 남자 친구가 내게 물었다.
“회사 그만 두면 뭐할 거야?”
꼭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기억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향해 달려간다. 학창 시절에는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 모두와 경쟁했고,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캠퍼스 낭만을 즐기기는커녕 용돈벌이 아르바이트와 과제, 시험에 시달렸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먹고살 걱정에 취업전선에 뛰어들었고, 회사에 입사해서는 매달 잡지를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일했다. 사실 회사를 그만 두면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퇴사를 입 밖으로 꺼낸 후 뭐하며 지낼 거냐는 물음에 무엇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는 꼭 책방을 하고 싶으니까. 기왕이면 그 꿈과 연관된 일을 해보면 좋지 않을까. 그러니까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는 지금 잠깐 발판이 될 만한 도전을 해볼 심산이었다. 뭘 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여행이나 갈까 봐.”
가장 만만한 게 여행이라 둘러댔지만 진심이었다. 여행을 다녀온 지 꽤 되기도 했고, 혼자서는 한 번도 여행을 계획해본 적이 없다. 어쩌면 혼자만의 여행을 계획한다는 게 내겐 또 다른 한 걸음일지도. K가 내 잔에 술을 따르고 자신의 잔에 사이다를 따랐다. 그리고 고기 한 점을 깻잎에 올려 썬 고추와 쌈장, 파절이, 김치를 올리고 쌈을 쌌다. 한입에 쏙 쌈을 넣고 오물오물 씹으며 잔을 들어 내 쪽으로 기울였다. 내 잔을 K의 잔에 부딪히며 말했다.
“사이다가 감쪽같아서 귀여워.”
소주 한 잔 털어 넣고 고기 한 점 쌈장에 찍어 먹었다. 소주의 잔기운이 남은 입안에 짭짤하고 구수한 쌈장 맛이 돌자 침이 확 고였다. 원래 이렇게 칭찬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 회사를 다니며 진심으로 칭찬하는 법을 배웠다. 모두가 모두에게 그런 식이었다. 귀엽다, 똑똑하다, 착하다 등 낯간지러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해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다 보니 하는 것도, 받는 것도 익숙해졌다. 이 회사를 나가면 위험한 바깥세상에서 온갖 폭풍우를 뚫고 살아남아야겠지. 적어도 여기서 견디는 것보다 바깥세상에서 폭풍우와 싸우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
“회사는 어때? 다닐만해?”
“아직 배울 게 많아. 국장님이 멋있는 분이셔. 그래서 열심히 따라가려고.”
나도 저런 말을 할 때가 있었다. 우리 대표님 인간적으로 진짜 좋은 분이라고, 가끔 모두가 재미없을 것 같아 망설인 주제였는데 책이 출간될 때쯤 그 주제가 이슈가 돼서 관심을 받기도 하고, 이 힘든 잡지 바닥에서 월급 밀리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며 호언장담하고, 육 개월에 한 번씩 돌아오는 장기휴가 때는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최대한 연락 안 하려고 노력하고, 큰일이 생기면 그 일이 왜 벌어졌는지부터 짚어보고 그럴만한 일이었으면 별말 없이 넘어갈 정도로 마음도 넓어. 그런데... 이제는 확신이 없다. 사람이 돈과 시간에 쫓기면 밑바닥을 드러낸다. 그게 그 사람의 참모습이라거나 참모습이 아니라거나 장담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사람이 부족한 게 있으면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다른 것들을 신경 쓰지 못하는 법이다. 그래서 이제는 대표의 장점이라고 꼽았던 모든 것들에 대한 확신일 흔들린다.
K의 남자 친구 잔에 소주를 따랐다. 로고 가장 윗부분까지 차오르게. 이번엔 K의 남자 친구가 내 잔에 소주를 따랐다. 로고 중간까지 차오르게. 그리고 집게와 가위를 뺏어 들었다. 마지막 남은 고기 한 덩이를 철판에 올렸다. 흰 김이 피어올랐고 이내 환기구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나와 K, K의 남자 친구는 잔을 부딪혔다.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를 떠올리지 못할 때까지 마셔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