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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ky Apr 21. 2020

#10 제주 여행, 취해버렸다

혼술, 혼취

“소주파, 맥주파?”


“소주파요.”



사장님이 간결하게 묻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켜고 천천히 가게를 둘러봤다. 혼자가 민망해 후다닥 자리에 앉는 바람에 경황이 없어 보지 못했는데, 꽤나 아기자기한 공간이었다. 자개장롱, 고동색의 고급스러운 소파가 놓여있고, 내가 있는 문이 없는 작은 방에는 빈티지한 소품들이 가득했다. 정신이 있을 때 사진을 찍어야 할 것 같아서 앉은자리에서 가게 곳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만하면 됐다 싶어 카메라를 끄고 P에게 카톡을 보냈다. 토라진 마음이 좋은 가게를 찾았다는 기쁨에 모두 풀렸다.



잘 도착해서 저녁 먹는 중. 이것 봐. 여기 오빠가 좋아할 만한 곳이야.



간장에 조린 무와 푹 삶은 묵은지를 내 앞에 내려놓는 사장님께 빈 잔을 건네며 술을 더 주문했다.



“저 핸드릭슨 주세요.”


“뭐야, 소주파라며.”



당황한 기색이 영력 했다. 나도 덩달아 당황했다.


“아, 그, 소주 시킬까요?” 



사장님은 한 번 웃고 돌아서서 핸드릭슨을 만들었다. 곧게 뻗은 기다란 맥주잔에 주먹만 한 얼음을 넣고 핸드릭슨 조금과 토닉워터를 부어 섞었다.



“백오이가 없어서, 내가 키운 허브를 넣었어요. 이것도 향 좋아요.”



뭐든 상관없다. 혼자서 소주를 마셔본 적이 없기에 그저 소주와 도수가 비슷한 핸드릭슨을 선택했으니 향은 아무래도 좋았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파서 맥주를 급하게 마셨더니 술기운이 약간 올랐다. 핸드릭슨에서는 정말 허브향이 났다.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짧고 작은 허브인데도 향이 그토록 진하게 날줄은 몰랐다. 사장님의 말대로 백오이만큼이나 향이 좋았다. 홀짝, 홀짝, 홀짝. 안주는 손도 안 대고 잔이 바닥을 보일 때쯤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대표님이었다.



'받을까? 말까? 어차피 퇴근 시간도 지났으니까 굳이 받을 필요는 없겠지? 아, 그래도 받아야 하나?'



 가만히 화면만 들여다보며 고민하던 중 전화가 끊겼다. 아직 고민 중인데 안 받은 꼴이 됐다. 핸드릭슨을 다 마시고 가게 밖으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



“초연 씨, 밤에 미안해. 보도자료 보낸 기자들 리스트 좀 보내줄 수 있어?”


“지금은 제가 컴퓨터를 가지고 나온 게 아니라서. 들어가서 정리해서 보내드릴게요. 좀 늦기는 하겠지만...”



XX. 술기운이 아니라 진심에서 욕이 끌어올렸다. 내가 지금 제주도라는 걸 알고 있고, 퇴근 시간은 지났고, 밤 아홉 시가 다 됐는데 왜 지금 나한테 전화해서 그걸 달라는 거지? 전화를 하기 전에 아주 잠깐이라도 정말 딱 한 번이라도 '생각'이란 걸 해보면 급하지 않으면 연락하지 말았어야지. 급한 일도 아니었다. 하, 우선 시간을 벌었으니 짧은 시간 알차게 놀아야 한다.



“사장님, 여기 한라산 주세요.”


주방에서 한라산과 소주잔을 들고 나온 사장님이 만족했다는 듯 말했다. 


“소주파 맞네.”


내 속 모를 사장님이 한 말에 웃음이 터졌다.


“사장님 저 이거 한 병 혼자 다 못 마시는데 한잔 하실래요?” 


“좋죠.”



사장님이 자신의 잔을 가지고 나왔다. 내 잔과 사장님 잔에 따랐다. 바를 가운데 두고 사장님은 서서, 나는 앉아서 신세한탄을 시작했다. 소주 한 병은 어제는 손님이 많았는데 오늘은 태풍 때문인지 발길이 뚝 끊겼다는 사장님의 신세한탄, 제주도에 간 걸 뻔히 아는 대표가 전화를 해서 일을 시킨다고 그런데 이 사람이 악의가 없어서 더 짜증 난다는 내 신세한탄을 안주 삼았다. 또 한 병은 사장님이 아는 사람이 써준 캘리그래피 자랑과 그 아는 사람이 우리 회사에서 원고 청탁했던 아는 사람(아직 고료를 못 줬다는 죄송스러운 마음은 생략)이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비웠다. 



“내가 마시려고 남겨둔 술이 있어. 잠깐만.”


사장님은 반 정도 차있는 한라산 병을 내 앞에 내려놓고 계산대 옆 간판 불 스위치를 눌렀다.


“문 닫아야지, 뭐. 손님도 없고.”



 *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아침 9시였다. 비바람을 뚫고 걷는 장면, 이어폰을 끼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걷다가 바람이 불어 우산이 뒤집어져서 비명을 지른 기억, 맨투맨을 벗다가 머리가 옷에 끼어서 벽에 부딪힌 장면, 컴퓨터를 켜고 엑셀 파일을 열어 기자들의 소속 매체를 정리한 후 대표에게 메일을 보낸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미쳤네. 혼자 술 마시러 가서 그렇게까지 취한 건 처음이었다. 다행히 어제 통화를 한 건 친한 학교 동생이고, 우산은 멀쩡하고, 바닥에 너부러진 옷은 정리하면 되고, 방열 쇠는.... 없다. 분명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왔을 텐데 열쇠가 없다. 둘째 날 첫 시련이 벌써 시작했다. 침대와 벽 사이로 떨어진 건 아닌지, 손잡이에 끼운 채 그대로 들어온 건 아닌지 방을 이 잡듯이 뒤졌는데 열쇠가 없었다. 술이 덜 깬 것 같아 화장실에 들어가니 얌전히 덮어 놓은 화장실 변기 뚜껑 위에 열쇠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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