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영광을 떠올리며
“그때가 전성기였어.”
“과거의 빛나는 영광을 떠올리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뭔 소리야, 오빠”
“잘 생각해봐. 나랑 너, K, B 선배, J, S만 있었을 때, 그때 우리 진짜 못할 게 없었어. 각자 색깔 뚜렷했고, 일 하나 똑 부러지게 잘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때가 드라마로 따지면 시즌 2였다니까. 초창기 멤버 시즌 1이 끝나고 시즌 2가 시작하는 느낌이었어.”
“무슨 얘기 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선배. 그때 일이 똑같이 많긴 했지만 부담이 훨씬 덜했어요.”
B 선배는 매거진 초창기 멤버였다. 내가 입사했을 때 있었던 초창기 멤버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회사 남아있었던 에디터였다. P는 그때가 그리운 걸까. 사실 나는 그때 B 선배가 그렇게 일을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보다도 어렸기에 내 일만 힘들었지 타인의 일이 힘들다는 배려나 이해 같은 걸 고려할 깜냥도 되지 않았다. B 선배는 매거진 초창기 멤버로 새 잡지를 론칭한 후 바로 회사를 떠났다. 사실 나와 P는 B 선배와 친하지 않았다. B 선배와는 K가 그나마 우리보다 친했다. K의 말로는 밥친구, 고양이 산책 친구였다고. 핑계를 덧붙이자면 내가 B 선배와 친하지 않았던 건 썩 취향이나 성격이 맞지 않았고, 나이 차이도 꽤 났던 터라(B 선배와 P는 동갑이다) 다가가지 못했다. B 선배가 아날로그라면 나는 디지털이랄까.
*
그러고 보니 B 선배 송별회 날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남은 B 선배와 나, P는 합정에 있는 한 술집에서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셨다. 마감도 했고, 술도 얼큰하게 취해 폭음 기관차가 따로 없었다. 이미 B 선배는 혀가 꼬일 대로 꼬였고, P는 앞뒷말 다 잘라먹고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나는 어쨌든 선배가 앞에 있었기에 최대한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지만, 잘 안됐던 것 같다. 졸려서 하품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간 P와 술을 자주, 많이 마셔본 결과 P에게는 혈중 알코올 농도를 4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아마 P의 체내 혈중 알코올 농도 4단계를 처음 체험한 날이었을 거다.
1단계 0~25%
말수가 많지 않고, 술을 반 잔씩 나눠 마신다. 안주를 별로 먹지 않는다. 레크리에이션 자격증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사회를 본다. 자리를 재밌게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다.
2단계 25~45%
말수가 상당히 많아지고, 술 한 잔을 한 번에 마신다. 슬슬 안주를 향한 젓가락질이 잦아지며 목소리가 커진다.
3단계 45~85%
대체로 2단계를 유지하되 간간히 주어를 빼먹은 목적어와 서술어만 활용한 문장을 구사한다. 앞뒷말 다 잘라먹고 하고 싶은 말만 해서 청자가 말의 의도를 해석해 대답해준다. 대부분의 술자리는 3단계에서 끝나는데, 4단계까지 가는 건 쉽지 않다.
4단계 85~100%
3단계+블랙아웃. 솔직히, 4단계까지 간 P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도 이미 블랙아웃.
B 선배 옆에 내가, 맞은편에 P가 앉았다. 그날 뭘 먹고, 뭘 마셨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P는 테이블에 기대 턱을 괴고 그동안 못했던 말을 쏟아냈다.
“B, B가 그만두면 나는 이제 어떡하지. 잡지가 잘 나올까?”
“P, 나올 거야. P가 잘하잖아.”
“나는 B가 선임이라고 생각하고 했는데, 이제 B가 없으면 누가 선임 에디터가 되냐고...”
“나도 선임하라고 했을 때 안 했어. 난 전에 있던 선임 에디터처럼 할 자신이 없었거든. P가 해. 누가 하겠어? P가 해야지.”
우리에게 처음부터 선임 에디터가 없던 건 아니다. 지금의 에디터들이 입사하기 전, 내가 입사하고 6개월 정도만 선임 에디터가 있었다. 그 선임 에디터의 존재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도 처음 그 선임 에디터가 퇴사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당시에는 기획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원고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잘 몰라서 그저 하라는 대로 하면서 감각을 기르던 중이었는데 선생님처럼 코치해주던 선배가 떠난다니. 청천벽력이었다. 아마 B 선배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대표가 B 선배에게 선임 에디터를 제안했고 B 선배는 월급을 더 줘도 싫다고 거절했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B 선배는 '선임' 명찰이 무척 부담스러웠고, 그 일을 모두 해낼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P 아니면 누가 선임을 해! P가 해!”
“난 아직 깜냥이 안된다고!”
둘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선임'이 가진 무게가 내 생각보다 더 무겁다는 걸 둘의 대화를 들으며 느꼈다. 방향키를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건 대표의 몫이지만 노 젓는 사람들에게 구령에 맞춰 노 젓는 법을 알려주는 선임의 역할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어렵다는 걸 말이다. 결국 P가 안주를 싹 비우고 술 한 병을 다 마신 후에 우리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 후로 B 선배와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다. 연락을 따로 주고받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막상 그날을 떠올려보면 떠나는 B 선배의 발걸음은 무거웠어도 어깨는 무척 가벼워 보였다.
*
김치수제비와 아베리 코 철판 스테이크가 나왔다. K는 요리를 보자마자 감탄사를 터트렸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수저를 들었다. P는 스테이크를 한 점, K와 나는 수제비를 한술 떴다. 수제비의 쫄깃한 식감과 새콤한 김치 수제비 국물의 조화가 좋았다. 소주 한 잔을 마시고, 담백한 고기에 달콤한 데리야키 소스를 찍어 먹었다. 김치 수제비, 스테이크 각각 맛이 일품이지만 함께 먹으면 더 맛있다. 삼겹살에 된장찌개, 냉면에 숯불고기라면 아베리코 스테이크에 김치수제비가 환상의 짝꿍이랄까 소주 한 잔 더 하고 싶지만, 속도가 지나치게 빠른 것 같아 애꿎은 소주잔만 만지작거렸다.
“B 선배 송별회 우리끼리 했었잖아. B 선배랑 2년 가까이 같이 지냈는데 그날만큼 편하고 친하게 대한 적이 었었던 것 같아.”
“그날 B 선배랑 P 구경하는 게 얼마나 재밌었는지 알아요, K?”
K는 하이볼을 마시다 말고 웃으며 내 말에 반응했다. P가 소주 한 잔 시원하게 마시고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K에게 물었다.
“K, K는 선배랑 연락하죠?”
“네, 저는 B 선배랑 한 번 본 적 있어요.”
“뭐하고 지내신대요?”
“그때는 다른 일 구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벌써 몇 년 전이라... 지금은 이직하셨는지 모르겠네요.”
“B 선배는 퇴사하고 어땠을까? 3년 넘게 다닌 회사를 그만둔 거니까. 되게 기분 이상했을 것 같아.”
“음, B 선배한테 직접 물어본 적은 없지만 확실히 표정도 밝고, 여유 있어 보이긴 했어요. 회사 다닐 때랑은 다르게.”
K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P와 나는 동시에 말했다.
“역시... 퇴사가 답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