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일상의 맛 05화

팥죽은 왜 먹는 건가요?

팥죽

by Becky

팥을 싫어한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껍질, 아주 미미한 단맛이 나지만 떫고 퍽퍽한 질감 때문에 푹 삶은 팥은 영 정이 가지 않는다. 기회가 될 때마다 지인들에게 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종종 언급하는 편이다. “민트초코를 싫어해”와 비슷한 호불호 느낌으로 받아들여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고 앞으로 팥이 들어간 음식을 사 오거나 권하기 전에 차단하기 위한 자기중심적인 마음에서. 하지만 체감한 지인들의 반응은 거의 일관됐다.


“불쌍해.”

"아니요.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는 거라니까요."


이토록 팥을 싫어하는 이유는 흔히 어떤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하는 핑계와 비슷하다. 어릴 적 질리도록 많이 먹어서다. 그 때문인지 팥을 보기만 해도 입안이 텁텁해진다. 지금은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어릴 때 시골 큰댁이 살던 초가집이 무너져 현대식 건물을 지어야 했다. 공사가 끝나고 새집에서 집들이 겸 가족 모임을 했는데, 당시 기가 약한 어린아이를 새집에 들이면 안 된다는 할머니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엄마는 나를 데리고 가족 모임에 참석했다. 그 후 할머니가 주의를 준 것처럼 나는 열병을 크게 앓고, 엄마는 그제야 할머니의 말이 생각나 팥이고 소금이고 부적이고 온갖 귀신 쫓는 것들을 집안 곳곳에 뿌렸다. 엄마의 노력 덕인지, 자연스레 형성된 내 면역력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흘러 건강을 되찾았고, 건강해진 후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엄마는 몇 년간 주기적으로 팥죽을 끓여 먹였다.


(아빠의 말에 따르면 집 벽지에 삶은 팥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고 한다.)


이때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나도록 팥이 싫다.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는 팥이 들어가는 음식이 많다. 팥죽, 팥칼국수, 수수팥떡, 팥빙수, 양갱이는 물론이고 겨울의 별미인 호떡, 호빵, 붕어빵도 있다. 그래도 가끔은 팥을 안 먹는 나 자신이 밉기도 하다. 여행을 가서 꼭 먹어야 하는 음식에 팥이 들어가면 억지로라도 먹어볼까 고민하는데, 제주에서 대면한 오메기떡이 대표적이다. 오메기떡은 제주를 방문하는 이들이 꼭 맛보는 대표적인 현지 음식이라 팥을 싫어해도 한 번쯤 먹어봐야지 생각하다가도, 입속에서 맴돌 팥 맛이 떠올라 혓바닥에 적신호가 뜨는 탓에 포기하기 일쑤다. 살면서 할 수 있는 미식을 하나 놓쳤다는 절망감은 이루 표현할 수 없다.


팥만 안 먹을 뿐인데 편식쟁이로 낙인찍히는 기분은 썩 달갑지 않다. 예전에는 팥을 포함한 콩류를 일절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순두부나 두유처럼 제 형태를 잃은 콩은 잘 먹는다. (먹는 것까지 노력하고 싶지 않지만) 노력의 성과다. 나는 '편식쟁이’가 싫어서 콩을 먹기 시작했고, 지금은 꽤 괜찮은 성과를 내 나름대로 만족한다. 나이가 들수록 입맛이 변한다고 하던데, 또 혹시 모르지, 십 년 뒤에는 내가 팥죽에 뜬 새알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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