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고 이야기
레몬에 대한 글을 쓰려니 지난달 휴가 때 들렀던 찻집에서의 디저트가 생각났습니다. 속을 파낸 레몬 껍질을 버리지 않고 바로 그 안에 레몬즙과 설탕, 젤라틴을 넣고 굳힌 레몬 젤리였습니다. 단맛보다는 새콤한 맛이 더해서 함께 마시던 홍차와 잘 어울렸습니다. 그에 꼬리를 문 생각은 수입 레몬인지 국산 레몬인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모처럼 쉬는 날을 즐기지 못하고 재료 생각을 하는 것은 몹쓸 직업병입니다. 마침 제주에서 레몬이 출하되는 시기이기도 했고, 휴가가 끝나면 저 역시 부지런히 레몬 작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겠지요. 그러니 더욱 쉬는 시간이 소중했답니다.
가게에 레몬이 도착하는 날은 귀한 손님맞이 하듯 가게 입구가 부산스럽습니다. 택배 상자를 열자마자 레몬 향기가 화사하게 퍼집니다. 제주에서 레몬을 보내주시는 농부님은 동백꽃을 한 송이씩 넣어 보내 주시는데 멀리 제주의 안부를 느낄 수 있어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싱그럽고 노란 레몬들이 가득 찬 상자들을 열고 있으면 그날만큼은 동네에서 제일 부자가 된 것만 같습니다. 양껏 냄새도 맡아보고 색과 모양도 이리저리 살핍니다. 품에 안은 재료와 오래도록 인사하고 싶지만 얼른 주방으로 옮겨야 합니다. 땅과 헤어지고 나무와 헤어진 재료의 시간은 빨리 흐릅니다. 얼른 보듬어 병 속에 넣어 두어야 합니다. 단정에서는 수제청, 잼, 콩포트, 피클, 염장과 같이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맛이 숙성되는 것을 느끼면서 먹는 방법으로 재료를 다룹니다.
가장 기본은 레몬청 만들기입니다. 단정의 대표 제품인 과일청 중 하나인 제주청의 중요한 재료입니다. 제주청의 이야기는 다음 제주의 재료 이야기에서 다시 한번 더 해드릴게요. 흔히 알고 있는 레몬청 담그는 법은 레몬을 얇게 잘라서 설탕에 재우고 삼투압 작용으로 빠져나오는 즙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정의 레몬청은 껍질부터 속살, 즙 한 방울까지 모두 먹을 수 있게 만든 것이라 모양도 질감도 좀 다릅니다. 특히 껍질 표면을 갈아서 넣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향미가 더욱 진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단정에서 정식으로 제주 레몬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21년도부터였습니다. 이전에는 수입 레몬을 썼지요. 수입 레몬이라 하면 농약투성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수입이라는 글자만 떼면 그들도 평범한 레몬입니다. 오히려 레몬 농사를 더 오래 지은 미국과 유럽은 품질과 맛에서 더 안정적이지요. 참고로 수입 과일에 붙어 있는 동그란 스티커 * PLU 라벨에 기재되어 있는 숫자들을 잘 살펴보면 이력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수입 과정에서 신선도를 위해 뿌리는 왁스입니다. 이게 먹어서 이로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를 씻어내기 위해 작업장에서 1 ~ 3차 세척을 거치는데 이 과정에서 레몬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집니다. 특히 레몬 껍질이 많이 상해요. 껍질에 좋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까지 해서 먹는 레몬이 의미가 있나? 의문이 생겼습니다. 찝찝하거나 물음표가 생기는 일은 반드시 명확하게 결론을 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일은 항상 몇 배로 덩치를 키워서 뒤통수를 후려칩니다. 그래서 과감히 수입 레몬을 쓰는 일을 포기했고, 한동안 레몬 관련 작업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 레몬을 만났습니다. 처음 만난 제주 레몬이 어찌나 쓰고 맛없었던지 지금 생각해도 혀가 얼얼합니다. 단정의 레몬청도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재료와 레시피가 친해져서 좋은 맛을 내기까지는 역시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가 봅니다. 물론 지금의 제주 레몬은 품질이며 맛이며 생김새까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주문하면 다음 날 도착하는 빠른 배송 덕분에 왁스칠을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세척이 쉬워졌고 재료의 이력도 정확합니다. 병에 담기까지 모든 과정이 편안해집니다. 무엇보다 레몬을 껍질째 먹을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레몬뿐만 아니라 웬만하면 재료의 껍질은 먹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속살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껍질은 마치 태아를 보호하는 자궁과도 같습니다. 그 역할을 이해하면 향과 생김새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껍질과 속은 성질이 서로 다르며 껍질을 보면 속의 상태를 알 수가 있습니다. 둘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손질을 멈추고 레몬의 노랗고 반질반질한 껍질을 힘 있게 문질러 봅니다. 미끈한 오일 같은 것이 손에 묻어납니다. 진한 레몬 향이 콧속을 찌릅니다. 어쩌면 이 향이 태초부터 이어지고 또 이어져 왔을지도 모르겠다생각하니 레몬을 만질 수 있는 이 시간이 참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제주만 아니라 우리의 땅에서 자란 재료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나고 자랐다는 것은 곧 국적입니다. 사람으로, 재료로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 모두 하나의 뿌리로 이어지고 맙니다. 굳이 사람과 재료로 나눌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어차피 시작은 모두 작은 세포 조각 하나, 거기서부터였을 테니까요.
* PLU 스티커에 대해
수입과일이나 채소에 붙어있는 *PLU(price look up) 스티커는 숫자코드가 적혀 있는데 이 배열을 잘 따져보면 그 이력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4자리 코드는 농약이나 비료를 사용해서 재배하였다는 뜻이고, 5자리 코드이고 첫자리가 9로 시작한다면 이는 유기농으로 재배되었다는 뜻입니다. 단 5자리 코드이고 첫자리가 8로 시작한다면 이는 유전자 변형 GMO로 재배되었다는 뜻이다. 통상 바코드의 앞 3자리는 과일이 수입된 국가를 나타내며 이를 확인하면 어느 나라에서 생산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위키디피아 중
먹고 사는 일 단정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