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향수를 쓰지 않습니다.
저는 원래 향수를 굉장히 좋아해서 어린 시절에는 가지각색의 향수를 모으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그때는 향수병만 이쁘고 독특하면 데려오곤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어떤 향에 대한 싫고 좋음이 확실해졌습니다. 진한 머스크나 장미향보다는 베르가못이나 우드, 라벤더 같은 자연스러운 식물향을 더 좋아했습니다. 이후에는 향수의 원재료까지 파고들어 향수를 직접 만드는 분의 것을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단정의 일을 하는동안 점차 향수와 멀어졌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음식에 화장품이 닿아서는 안되고, 재료를 다루면서 나는 향들을 민감하게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향수를 뿌릴 수가 없었습니다. 얼굴과 몸에 바르는 로션도 향이 없거나 성분이 순한 것을 찾게 되었고 아예 바르지 않는 날도 많아졌습니다. 굳이 향수를 찾아서 뿌릴 이유가 없을 정도로, 생강을 달이는 날에는 생강향이, 유자를 작업한 날에는 유자향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베어 들었습니다. 사시사철 계절의 향을 고스란히 품은 재료들속에 있으니 비싼 값을 주고 향을 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특정한 향을 수집하려는 욕심이 점점 사그라들었지요. 그 어떤 화장품도 원물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유의 향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깨달았습이다.
개인적으로 레몬과 유자, 탱자 등의 감귤류를 만지는 날에는 비타민을 실제로 복용한 것처럼 기분이 상쾌하고 눈이 번쩍 뜨이기도 합니다. 생강과 도라지를 달이는 날에는 왠종일 그 증기를 코로 들이마셔야 하니 감기 기운이 뚝 떨어지는 경험도 한적이 있습니다. 재료를 만지는 일이 고되서 제 에너지를 뺏긴다고만 생각했는데 되려 재료에서 기운을 받아올 수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차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예절에도 향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찻집을 가거나 차를 마시는 자리에 초대받았을 때는 과하게 향수를 뿌린다거나, 진한 립스틱을 바르는 일은 자제하도록 합니다. 내가 무심코 뿌린 향수 하나가 한 공간 안의 모든 차향을 바뀌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진한 립스틱은 찻잔에 자국을 남게 하고, 고유의 미끈한 성분이 찻물에 녹아나 역시 맛을 해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찻집을 운영하는 동안에는 화장품을 거의 바르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분을 맞이하는데 제 꼬락서니가 별로라도 그런 이유겠거니 하시면 되겠습니다.
어느 날, 단정에 오실 일이 있다면 그날은 편안하게 꾸밈없이 오셔서 차를 드셔보세요. 몸속에 따뜻한 차를 차곡차곡 채우고, 그러는 동안 베어든 차향이 하루종일 코끝에 맴도는 것을 느껴보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