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리고 식히고, 조리고 식히고,
일 년 중 특히 10월과 11월은 가장 바삐 움직여야 하는 시기입니다. 단정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수제청의 재료인 생강과 도라지가 나오고, 그 외에 탱자, 모과, 유자, 배 등이 줄줄이 그 뒤를 잇습니다.
올해는 몇 해 동안 만들지 않았던 탱자와 모과청, 유자청을 다시 만들었습니다. 찻집을 운영하다 보니, 더 많은 단정의 맛들을 메뉴판에 추가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달까요. 다행히 맛있다며 많이 찾아주셔서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가을을 보내고 있습니다.
단정의 유자청은 껍질을 얇게 채 썰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껍질과 속을 갈아서 만드는 수제청입니다. 이렇게 만들면 설탕의 양을 조금 덜 넣어도 진한맛의 유자차를 드실 수 있습니다. 질감도 진득해서 잼으로 드실 수도 있고요. 그런 유자청을 만들고 있습니다. 손질하다 보니, 일부는 유자정과를 만들어 다식으로 내어도 괜찮겠다 싶어 오랜만에 요리노트를 뒤져봅니다.
정과의 기본은 한국의 전통과자 조리법으로 온갖 과일, 생강, 연근, 인삼 같은 것들을 꿀이나 설탕물에 조려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유자정과는 유자의 껍질로 만듭니다. 껍질 안에 붙어 있는 하얀 줄기들을 잘 떼어내고 알맹이도 다 제거합니다. (이때 떼어낸 알맹이는 청으로 만들면 됩니다.) 손이 많이 가지만 꼼꼼하게 다듬어야 정과의 모양이 예쁘게 나옵니다. 시럽에 재료를 넣고 조렸다가 식히고 조렸다가 식히는 작업을 반복하고 건져내어 원하는 식감이 나올 때까지 건조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정과의 최종 질감이 정해집니다. 짧게는 3일 길게는 몇 주까지도 걸리는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조리법이지요. 달콤하고 쫀득한 식감 때문에 아이들이 특히 좋아합니다.
유자 정과처럼 껍질을 정과로 만드는 경우 껍질에서 나오는 특유의 쓰고 아린맛이 사라지고 본연의 향과 달콤함을 위주로 먹을 수 있습니다. 특히 홍차와 함께 이 계절의 다식으로 더할 나위 없습니다. 지난밤 시럽에 침지해 놓은 유자 정과를 들여다봅니다. 유자의 샛노란 본래색은 한층 사그라 들고 진하게 가라앉은 노란색으로 변해 있습니다. 뒤집어 보니 하얀 부분은 잘 익어 투명해졌습니다. 다시 불을 켜서 은은한 열로 조리기를 시작합니다. 온도, 시간, 색, 질감을 체크하면서 저의 감각을 총동원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반복 작업이지만, 진득한 기다림이 필요한 음식입니다. 저는 적어도 3번 정도 이 과정을 반복해서 정과를 완성합니다. 그렇게 해야 제가 생각하는 단정의 맛과 식감이 만들어집니다.
이 일을 컴퓨터 문서 작업처럼 컨트롤 CVZ 반복하듯 할 수 있다면 좀 편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음식을 만드는 일은 그런 단축키로 대신할 수 없는 세밀한 감각들이 곳곳에 동원되어야 하는 일인 듯합니다. 그런 시간으로 채워져야 하는 일의 면모를 유자정과를 통해서 또 한 번 체득합니다.
다 만들어진 유자정과를 가만히 씹어봅니다. 향긋한 유자향기와 함께 달큼함이 입안을 가득 채웁니다. 오늘의 유자정과는 이 정도면 되었어,라는 퀘스트를 달성했습니다.
그런데 단정의 그림은 대체 얼마나 더 많은 과정들을 쌓아야 완성할 수 있을까요? 얼마나 더 조리고 식히고를 반복해야 할까요? 그런 날이 과연 오기는 하는 걸까요? 그런 물음들 앞에서 오늘은 조금 작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