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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윤 Jun 28. 2024

슬로 러너입니다만

링 위에서 살아남는 자

올해 한 가지 뿌듯하다고 할까 성취감을 느꼈던 일은 하프 마라톤 대회에 참여한 일이었다. 지난 2년간 매일 열심히 뛰었다고 자랑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꾸준함을 유지해 왔다. 1km도 못 뛰던 사람이 4km를 뛰고 7km를 넘어서더니 올해는 21km를 뛰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이란 타인의 노력에 관대해서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묻는다.


"이제 진짜 잘 뛰시겠네요."


그럴 때마다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하하.. 느리게 뜁니다."


2년이라는 시간 치고는 여전히 느리다. 내가 꾸준히 하는 운동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더 오래 열심히 하는 운동이 러닝은 아니라 변명할 거리는 있지만 그래도 들인 시간에 비하면 발전이 느린 편이다.


회사에 러닝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편인데 그 사람들에 비하면 거북이라 할 정도다. 회사의 어떤 과장님은 뛴 지 3개월 만에 20km는 가볍게 뛰는 분도 있고, 6개월도 안되어 풀코스를 완주한 사람도 있다. 이제는 속도를 5분대로 빠르게 뛰는 연습 중이라 할 때마다 '저도 뛰는 거 좋아합니다.'라는 말이 쏙 들어간다. 러닝을 잘 안 하는 척 그저 '정말 대단하세요!'하고 박수를 짝짝 치며 러닝과는 관련 없는 사람인 척 방청객 모드로 전환해 버린다.


이번 하프 마라톤 대회에서도 그랬다. 내 속도로 안전하게 뛰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래도 느린 것은 느린 것이라 꼴찌 그룹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뛰었다. 사실상 도전하기 어려웠던 거리였을지도 모르겠다. 마라톤대회에 참가하기 전까지 가장 긴 거리를 뛴 것은 13km 정도였다. 13km가 조금 무난하게 느껴졌으므로 '남은 7km 정도는 금방 뛰겠네! 하프에 도전해 봐야지.' 하고 자만심에 들떠 마라톤 대회를 덥석 신청해 버렸다.


13km를 뛰던 나는 13km가 지나고 14km가 되고 15km 되는 지점마다 체력이 외제차 가격 감가 상각되듯 쭉쭉 떨어진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나중에는 거의 기어가다시피 뛰었고 출발점 근처에서는 주저앉아버렸다.


종아리 근육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은지는 오래되었고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고관절이었다. 이렇게 장시간, 장거리 동안 고관절을 회전하고 움직여본 적 없던 몸은 '도른 자야!! 이제 좀 그만해!!'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때 짝꿍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야? 다들 들어오는데 왜 출발선에서 안 보여?"


"헥헥.. 나 쉬고 있어. 나 배가 너무 고파."


실제로 나는 엄청난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처음 하프 마라톤을 뛰는 나는 10km 지점에서 주는 바나나를 먹지 않았다. 그 이유는 혹시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앞섰던 것이다. 광진구 한강변에서부터 뛰어이미 구리까지 와 있었고 주위에는 화장실이 잘 안 보였던 것이 두려움을 부추겼다. 그래서 일단 참고 뛰었는데 초보자의 섣부른 판단 착오였다. 괜히 그 지점에서 바나나를 주는 게 아니었다!


타인의 친절을 함부로 거절한 보복을 당하는 것일까. 12km가 넘어가면서부터 몸은 '당을 달라!! 당! 당! 당!' 하며 위를 쥐어짜기 시작했고 출발점 근처에서는 고관절의 반항적 아픔에 더해 극심한 허기까지 느꼈다.


"쉬고 있어? 그런데 빨리 뛰어 들어와야 할 것 같아. 천막 치우고 있는데 하프 뛰는 사람들에게 주는 빵을 치우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순간 나는 뛰었더랬다. 짝꿍은 아직까지도 놀린다. 거지꼴이 되어서 빵을 받겠다고 결승 지점을 뛰어오고 있는 모습을 보니 불쌍하면서도 웃음이 터졌다고. 하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출발점에서 나눠주는 단팥빵과 바나나는 임금님 수라상처럼 맛있었다.

달콤한 단순당으로 낮아진 혈당을 대충 채우고 나니 나는 슬로 러너에 더 적합한 사람은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나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진득하게 무엇을 못하는 사람, 변덕이 심한 사람이었고, 변화에 적응을 잘하고 빠르게 체득하는 것이 수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난 5년간 3년간은 요가를 하고 2년 간은 러닝을 하고, 지난 1년간은 꾸준히 러닝과 수영을 하면서 깨닫기 시작했다. 나라는 인간은 내 생각과 다르데 느리게 성장하는 사람은 아닐까.


배고팠던 나의 하프 마라톤의 추억 ㅎㅎ


수영을 할 때에도 매일 새벽 4시 반에는 일어나 수영장을 향하는 것은 비교적 잘한다고 할 수 있으나 수영장 레일에서 매일 더 빠른 속도를 갱신하는 타입은 못된다. '꾸준히'라는 것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는 것처럼 어느덧 저만치 앞에 가 있는 성장을 이루게 되는데, 그래서 그런지 8개월 정도 지난 시점에는 상급반이라는, 애초에 넘보지 못했던 고지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상급반에서 조차 나는 빠르게 수영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제일 마지막 주자로 서 있으려 하지만 어느 때에는 내 의도가 통하지 않아 2-4번째 주자로 레일을 돌기 시작한다. 그럴 때에도 속도가 느려서 결국에 3-4바퀴를 다 돌고 나면 맨 마지막으로 들어오기 일쑤다. 내가 수영장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먼저 가세요'이니 말 다 했다.


하지만 나름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갖는 것은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해왔다는 것이다. (이것도 혼자만의 기준이다.) 누군가는 30년 넘게도 일 했겠지만 어쨌든 부침이 있어도 15년 이 업계에 잘 살아남아 왔고, 요가와 명상을 시작한 지 5년이 넘어가지만 한 번도 이제 더 이상 하지 말아야겠다 생각한 적이 없다. 수영도 러닝도 그랬다. 부침은 있었지만 어쨌든 장기 주자로 아직은 살아남아 일주일에 며칠이라도 길 위를 달리고 레일을 돌며 운동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하프 마라톤 대회도 그렇게 결승점을 통과했다. 아마 나의 삶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왔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든다. 부침도 있고 실패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결승을 향해 달려가는 슬로 러너. 나의 삶이 종국에 추구하는 바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최근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었다. 이 중 1장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그는 <소설가는 포용적인 인종인가>를 시작으로 써 내려가다 소설가로서의 자격으로 마무리한다. 소설이라는 것은 누구나 쓸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등판이 가능하지만 결국 장기간에 걸쳐 살아남는 사람은 극소수라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가에게는 꼭 필요한 자질과 자격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소설을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내적 충동(drive), 장기간에 걸친 고독한 작업을 버텨내는 강인한 인내력'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나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회사에서도 들었다. 누구나 링 위에 올라가기 전까지는 자신이 프로 선수 같겠지만, 결국에 링 위에서 버텨낸 자는 극소수라고. 꾸준히 30-40년 시장에서 버텨낸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성공했다고 말이다.


모든 인생이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갈 길을 정했으면 최선을 다해 버티는 것이다. 단계마다의 미션을 수료하고 다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잠시 주저앉더라도 다시 일어나 그 길을 걸어가는 것. 빠르게 달성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지치지 않고 스스로를 소모하지 않고 꾸준히 걷고 또 걷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슬로 러너인 나는 조금의 위안을 얻는다.


그래, 나의 삶도 이렇게. 꾸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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