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변화시키는 직관의 힘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요사이 재미있게 읽고 있다. 책에서 그는 자신이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는지를 썼는데 그 과정이 흥미롭다. 그는 마치 아주 우연처럼, 계시처럼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표현했는데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길을 한 순간에 찾는다는 것이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일이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삶의 중요한 진실이 그가 소설가가 된 계기에 숨어있을지도 모른다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20대를 다 지나는 어느 날 바빴던 가게 일이 안정을 찾자 야구장을 찾는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20대에 재즈바 같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날씨는 맑고 생맥주는 시원했던 그런 날이라고 그는 기억한다. 그리고 야구장에서 선발 투수가 공을 던지고 그 공이 타자의 방망이에 맞고 관객들은 박수를 치던 그 순간, 그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때의 감각을 표현하자면 '하늘에서 뭔가가 천천히 내려왔고 그것을 두 손으로 멋지게 받아낸 듯한 기분'이었다고. 어째서 그것이 왔는지 이유는 그때도 지금도 모르지만 일종의 계시처럼 그것은 일어났다.
그는 그 순간을 설명하기 위해 'ephiphany'를 설명한다. '본질의 돌연한 현현(顯現)', '직감적인 진실 파악'을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작가의 말을 빌어 쉽게 설명하자면, 어느 날 돌연 뭔가가 눈앞에 쓱 나타나고 그것에 의해 모든 일의 양상이 확 바뀐다'라는 느낌이라고. 바로 그런 일이 하루키에게 일어났고 그 일을 경계로 그의 삶의 모든 양상은 바뀌게 되었다.
그날 하루키는 야구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원고지와 펜 한 자루를 사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쓴 소설을 <군조>라는 출판사에 보내게 되고, 그는 에피퍼니의 순간에 떠오르는 '무엇인가를 쓰고 싶다는' 욕구를 해소했기에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놓고 그것을 잊어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출판사에서 연락이 와 당신을 포함한 5명의 후보자가 신인상 후보로 올랐다는 말을 듣는다. 비몽사몽간에 받은 전화라 별 감흥도 없이 '알겠다'는 대답을 하고 하루키는 아내와 함께 산책을 나간다. 산책 길에서 다친 비둘기를 발견하고 근처 파출소에 데려다 주기 위해 파출소를 가는 순간에 어떤 생각이 스친다.
'틀림없이 나는 <군조> 신인상을 탈 것이라고. 그리고 그 길로 소설가가 되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그는 어떤 이유도 없이 그렇게 확신했다고 한다. 그것도 아주 생생하게. 그리고 그 생각은 논리적이라기보다 거의 직관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직관에 의한 결정을 한 이야기는 비욘 나티코 린데블란드의 책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책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삶에서 중요한 순간에 내면 깊은 곳의 소리를 듣고 그에 따라 결정을 한다.
잘 나가는 굴지의 대기업을 그만둘 때에도, 승려가 되겠다고 결심할 때에도 그는 직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고요하고 차분한 상태에서 일련의 사고 과정에서 도출된 마지막 연결 고리도, 추론의 결과도 아닌 완전한 결론이 되어 불쑥 나타난 생각에 삶을 내맡긴다. 그리고 내면의 직관에 의지해 내린 결정은 고요하고, 단단한 확신을 준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직관은 충동과는 다르며 그의 삶은 직관을 통한 결정으로 더 자신과 일치하고 지혜롭고 올바른 길로 향한다.
그는 말한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정교하게 연마된 자기만의 조용한 나침반이 있다고. 하지만 그 지혜는 요란스러운 자아와 달리 은은해서 일부러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다. 자아가 던지는 질문과 요구는 그보다 몇 배나 시끄러워 지혜의 소리를 완전히 묻어버리기 때문이다.
내면의 소리란 완전히 새로운 생각과 개념이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며, 실은 오랜 시간 심사 숙고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그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억눌렸던 생각이 좀 더 자유롭게 흐르게 하자, 진심이 운신할 여지가 생겼고, 내면의 더 현명한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기 시작하니, 결심을 단행할 만큼 확신이 찾아온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하루키의 에피퍼니의 순간도 갑자기 사고처럼 찾아온 계시가 아닌 그가 자신 안에 오랜 세월 쌓아온 무엇인가가 밖으로 드러난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가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의 내면에는 10대와 20대를 거쳐오며 했던 경험들, 만났던 사람들, 읽었던 책들이 남긴 무엇인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차곡차곡 쌓였을 테고 어느 맑고 화창한 날 야구장에서 고요한 순간에 순간의 지성이 되어 그에게 찾아온 것은 아닐까.
20대에 가게를 운영하면서 그는 너무도 바빴다고 말했다. 20대 후반이 되자 터널을 지나 빛이 보이듯 숨통이 틔인 순간이 왔고 그럴 때에 보게 된 야구 경기장에서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바쁘게 살아오면서 그간 외면하고 억눌렀던 무엇인가가 자유롭게 흐르게 되자 직관의 형태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오는 내면의 목소리는 삶을 변화시킨다. 직관이 이성의 힘보다 큰 것은, 직관이 주는 소리는 단순한 현재 상황의 단면만을 보고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어떤 총체적 진실들, 조건들을 통합해 내면 깊은 곳에서 샘솟는 지혜이기에 삶을 변화시킬 만큼 큰 힘을 지니게 된 것이리라. 두 사람 모두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이성적인' 생각도 계획도 없이 직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고, 삶을 다른 양상으로 전개시켰다. 또한 그 과정에 따르는 것은 '확신'과 '신뢰'였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란드는 직관의 소리를 듣기 위해 이따금 주파수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일상생활에서 틈을 내어 멈추고 고요를 느끼는 것, 정적의 순간을 찾는 것은 자아가 주는 요란한 소리, 근심, 갈등, 불안과 불행이 주는 소리에 끌리지 않고 내면의 단단한 소리를 듣기 위한 과정이라고 말이다.
'때론 쉬게 놔두는 것'
우습게도 세상의 지혜는 내려놓고, 쉬고, 멈추는 것에 있다.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리라. 요가에서도 들이쉬는 들숨보다 내쉬며 이완하는 날숨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완하는 것은 삶에서 필수적인 과정이며 내적 평화를 찾는 것은 삶을 확신과 행복으로 이끄는 길인 것이다.
나만의 길을 찾는 것은 바로 이런 평화의 길 위에 있는 것 같다. 자신에게 직관이 숨 쉴 수 있도록 여유를 주는 것. 고요와 정적 위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럴 때에 내면 깊은 곳의 지혜는 당신의 길을 마련한다.
삶의 마법 같은 순간이 자신에게 찾아올 수 있도록 더 내려놓고 이완하라.
그리고 만약 당신에게 마법 같은 직관의 힘이 찾아온다면 그때는 온 마음을 다해 그 직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겨라.
그것이 어쩌면 자신만의 삶과 성공을 찾는 가장 중요한 원리인지도 모른다.
"이성적인 마음은 하인이다. 반면에 직관적인 마음은 신성한 선물이다. 우리가 창조한 사회는 하인을 섬기느라 선물을 잊어버렸다."
- 아인슈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