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툴렀지만, 충분했다

by 콩작가

TV에서 가끔 그런 장면이 나왔다.


“나는 우리 딸 믿어.”


그 한 마디에 딸은 울었고, 엄마는 품에 안아줬다.


나는 그게 부러웠다. 엄마가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렇게 말해주기를 바랐다.


“우리 딸은 뭘 해도 잘 될 거야.”


하지만 엄마는 다르게 사랑했다. 나는 엄마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길 바랐고, 엄마는 자기가 아는 방식으로 나를 지켜내려 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로 사랑하고 있었다. 산다는 건, 그런 오해가 천천히 깨어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 우리는 병상의 작은 간이 책상 앞에 앉았다. 엄마는 소녀처럼 앉아 있었다. 일흔이 넘은 얼굴 속에 열여섯 살 소녀가 보인다. 장난을 치고, 농담을 건넨다. 나는 그 맑은 얼굴을 마흔이 지나서야 비로소 알아보게 되었다.


편안한 얼굴의 엄마는 오래된 기억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겨울이면 토끼 몰이를 하던 어린 시절, 엄마를 좋아했던 까까머리 남자 동창생 이야기들. 그리고 매서웠던 시집살이 이야기까지.


무서웠던 아빠, 엄격했던 시부모의 이야기에도 엄마는 서러움이 없었다. 맨날 하던 이야기라며 지긋지긋하다고 화만 냈던 나도, 이제는 달라져 있었다. 그저 조용히 엄마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모두 지나간 일이었고, 과거의 상처는 현재가 되지 못했다. 우리는 6인실 병상에서 오래된 친구처럼 웃고 조잘거렸다.


“그래도 그만한 사람 없었다.”


미웠던 서방도 정이 들었는지 평가가 후하다. 아빠는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말 그대로, 이미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는데도 그리운가 보다.


자연스럽게 나도 아빠를 떠올렸다. 나는 아빠의 마지막을 기억한다. 아빠는 간암 말기였다. 전남대학교 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고, 순천으로 내려와 호스피스 병동에 2주일 정도 계셨다. 깡 말라버린 몸과 움푹하게 패인 볼을 하고 느리게 웃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빠는 처음에는 그래도 앉아 있기도 하고 말도 했지만 몇 일만에 침대 밖을 나오지 못했다. 그런 어느날 아빠가 엄마를 찾았다. 무뚝뚝하게 왜 찾느냐고 묻는 엄마에게 아빠는 말했다.


“올 가을엔 자네가 좋아하는 도토리나 주우러 가세.”


그 말은 아빠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건넨 사랑 고백처럼 들렸다. 참으로 멋대가리는 없지만. 죽음을 앞둔 아빠가 하고 싶었던 것이, 엄마와의 산책이라는 것과 그래도 단 한번 더 산다면 올 가을까지는 살고 싶다는 소망을 봤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은 아빠가 살아생전 내뱉은 마지막 말이 되었다. 우리 셋이 함께하는 가을은 영영 오지 못했다.


나는 아빠를 떠올리며 엄마의 다리를 쓰다듬었다. 붕대로 칭칭 감긴 다리를 조심히 쓸며, 딸 손이 약손이라고 빌어본다. 어쩌면 이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엄마의 다리에 뼈가 천천히 다시 돋아나기를. 피가 부드럽게 돌고, 곳곳으로 퍼져나가기를. 당뇨로 찐득해진 피가 맑아지고, 다리가 빨리 나아 우리 함께 걷고 웃는 날이 다시 오기를.’


하고 빌어본다. 후회는 늘 한 발 늦게 온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음을 우리는 직감한다. 엄마는 병이 들었고, 휠체어 없이는 제대로 걷기도 힘들다.


엄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딱 이렇게 5년만 더 살다 갔으면 좋겠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속으로만 삼켰다. 엄마가 나에게 얼마나 충분한 사람인지 말하지 못했다. 울컥거리는 속내가 눈물로 터져나올 것 같아서.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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