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화양영화 07화

말은 총보다 강하다

- <공작>, The Spy Gone North

by 김뭉치

스파이 영화를 좋아한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긴장감으로 오금이 다 저리는 기분, 그 치밀함과 짜릿함이 좋다. 여러 영화들이 있지만 MSG 빼고 천연으로만 간을 했다는 점에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스파이 브릿지> 류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공작>은 윤종빈 감독 스스로가 ‘구강 액션’이라 명명했듯 몸으로 보여지는 액션이 아닌 오고 가는 말들로 긴장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스필버그의 <스파이 브릿지>와 유사하다.


<공작>은 오고 가는 말들로 긴장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스필버그의 <스파이 브릿지>와 유사하다


국가란 무엇인가

<공작>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액션을 넣고 싶어도 넣을 수 없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의 큰 줄기는 암호명 흑금성의 대북 비밀 공작이다. 그러나 영화는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처럼 그 이면에 대해 이야기한다. 속고 또 속이는 공작의 뒤편에는 개인은 안중에도 없는 국가의 정보기관과 그들의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과연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고 있는가. 무엇이 현실인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현실은 기실 조작된 환상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영화의 촘촘한 그물망을 뚫고 의문들이 부표처럼 떠오른다.


속고 또 속이는 공작의 뒤편에는 개인은 안중에도 없는 국가의 정보기관과 그들의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흑금성은 안기부의 비밀 공작 요원으로 국군정보사령부 출신의 엘리트 과거를 지우고 신용불량자로 신분을 세탁한다. 그가 안기부 소속 요원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제임스 본드>로 위시되는 대개의 첩보영화처럼 밝거나 경쾌하거나 섹시하지 않다. 어둡고 무겁고 반영웅적이다. 영화 속 북한과 남한은, 남한이 경제적으로 조금 더 우위에 있을 뿐 정치 싸움이나 수 싸움, 도덕성에 있어서 도긴개긴으로 보인다. 철저히 자신의 신념대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흑금성은 멋진 인간이지만 흑금성이 하는 일은 아무리 봐도 전혀 근사해 보이지 않는다. 흑금성의 실제 모델인 박채서 씨는 고된 스파이 업무로 인해 늘 위장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스파이의 현실은 위장병 아니겠는가.


스파이의 현실은 위장병 아니겠는가


게다가 영화 속 흑금성은 안기부에 의해 키워지고 안기부에 의해 버려지는데, 이로 인해 그가 철저히 안기부의 졸개였으며 한 개인으로 전혀 존중받지 못했고 농락당했음이 밝혀진다. 또한 여야가 생산하는 북의 도발은 남한의 일부 세력과 북한의 합작품으로 드러나며, 국민들마저 그저 관람객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그들의 말마따나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개돼지’ 취급을 당해왔는지 모른다. 흑금성마저 정권이 바뀌자 6년간의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극의 긴장감이 떨어지고 루즈해진다는 점에서 아쉬움은 있다


후반부로 갈수록 극의 긴장감이 떨어지고 루즈해진다는 점에서 아쉬움은 있다. 초중반까지의 영화는 완벽히 첩보 장르의 그것이지만 후반부로 가면 브로맨스로 귀결된다. 다행인 것은 그 브로맨스가 신파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고 호연지기를 드러내며 훈훈하게 마무리된다는 점이다(극장에서 울컥하는 남자 관객들을 몇몇 보았다).


초중반까지의 영화는 완벽히 첩보 장르의 그것이지만 후반부로 가면 브로맨스로 귀결된다


근래 본 영화 중 최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는데, 특히 이성민의 연기가 돋보였다. 그는 베이징 주재 북 고위간부 역으로 소름 끼치면서도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미세하게 온몸을 떨며 눈가를 움찔하는 리 처장의 모습은 영화의 긴장감을 한층 끌어올렸다.


특히 이성민의 연기가 돋보였다


캐릭터와 혼연일체가 된 주지훈의 연기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면 섭섭할 것 같다. 카메라 셔터를 받으며 만두를 빚는 그의 고운 손을 보아도 이 영화 <공작>을 보고 나면 독사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게 만든다.


캐릭터와 혼연일체가 된 주지훈의 연기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면 섭섭할 것 같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들로 <공작>은 내게 근래 본 한국영화 중 가장 좋았다. 제아무리 할리우드라도 이런 영화를 만든 순 없을 거다. 남북분단이라는 실제 상황은 남과 북에만 존재하니까. 게다 최근의 남북관계 국면에서도 영화는 여러 가지로 뭉클한 데가 있다.



리얼한 세트와 음악에 대하여

엔딩 크레딧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당연히 중국에서 이뤄졌을 줄 알았는데 대만에서 촬영이 이루어졌던 것. 알고 보니 촬영 시기가 한한령이 내려진 때라 촬영은 대만과 국내 세트장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스파이가 북한에 침투하는 영화이니 당연히 북한을 배경으로 보여주면 좋지만 남북분단이라는 현 상황 상 대한민국은 북한을 촬영할 수 없는 유일한 나라라고 한다. 영화에서는 평양 부감신이 리얼해 어떻게 촬영됐는지 궁금했는데 해외에서 소스를 구해 합성한 것이라고 한다. 흑금성이 답사를 핑계로 찾게 되는 장마당은 동해시에서, 그림 같은 배경이 일품인 김정일의 별장 선착장은 안동 서부 선착장에서, 김정일과 흑금성이 처음 만나게 되는 주석궁은 3억 원을 들여 직접 지었다고 한다.


촬영 시기가 한한령이 내려진 때라 촬영은 대만과 국내 세트장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흑금성이 답사를 핑계로 찾게 되는 장마당은 동해시에서 촬영됐다. 고향 동해가 나와 반가운 마음!


그림 같은 배경이 일품인 김정일의 별장 선착장 신은 안동 서부 선착장이 촬영지다


김정일과 흑금성이 처음 만나게 되는 주석궁은 3억 원을 들여 직접 지었다고 한다


높고 넓은 주석궁에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장마당의 아이들과 대비되는, 잘 관리된 말티즈다. 2500만 원을 주고 캐스팅했다고 한다. 실제 김정일이 반려견을 좋아했다는데, 영화 속 말티즈는 참 예쁘지만 장마당의 시체 더미에 앉아 있는 아이들과 대비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게다가 극중 흑금성과 리 처장이 롤렉스 시계를 들여다볼 때마다 시각이 8시 10분에 맞춰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마치 그 시절 멈춰진 남과 북의 시간을 보여주려는 듯 시간은 시침과 분침은 늘 8과 2에 맞춰져 있다.


시침과 분침이 가리키는 8과 2, 감독의 말에 따르면 이 시각에는 큰 의미가 없다고


흑금성이 김정일을 만나러 가기 전 여러 테스트를 거치게 되는데 그때 흘러나오는 음악은 관객의 심장을 쥐어짜는 듯하다. 전반적으로 음악이 영화의 무드를 끌고 가는 점이 돋보였는데, <공작>팀은 조영욱 음악감독을 ‘조스 짐머’라 부른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 나니 어쩐지 그 별명에 공감하게 된다.



윤종빈의 뚝심


제 주변에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이 극장을 안 가는 이유가 볼 영화가 없어서 혹은 뻔해서라고 한다. '범죄와의 전쟁'의 테마곡('풍문으로 들었소')을 불러 친해진 가수 장기하 씨와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그가 "음악을 만들어도 사람들이 안 듣는다"고 하더라. 그때 내가 "기하 씨,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난 어릴 때 영화보다 음악을 더 좋아했거든. 요즘엔 음악을 잘 안 듣는 이유는 내 기호에 맞는 게 없기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영화도 똑같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많이 보는 성인들 기준으로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영화가 없기 때문에 극장에 안 가는 거다. 관객들의 기준을 획일화해서 만들 게 아니라 관객의 취향을 폭넓게 보고 그것을 충족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범죄와의 전쟁'이나 '곡성'의 경우도 만들 때는 반대가 많았고 난관에 부딪혔지만 상업적으로도 잘되지 않았나. 이런 시도들을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SBS funE에 게재된 윤종빈 감독의 인터뷰다(「[빅픽처] 윤종빈의 현미경 그리고 '공작'의 TMI」). 감독은 칸영화제 직후 관객들의 반응을 보고 <공작>을 다시 편집했다고 한다. 실제 흑금성은 김정일로부터 북한 여인과의 결혼을 제안 받았는데 그걸 영화로 각색해 북측 요원과의 동침을 강요받고 재기넘치게 빠져나가는 장면이 삭제됐다.


칸 영화제 상영 이후 북측 요원과의 동침을 강요받고 재기넘치게 빠져나가는 장면이 삭제됐다


다 된 영화를 다시 편집하는 게 쉬운 일인가. 하다못해 이 리뷰조차 다시 매만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데뷔작부터 감독의 작품은 어딘가 새로운 데가 있었다. 이번 인터뷰를 보고 감독의 독특함이 어디에 기인했는지 알 수 있었다. 멋지다. 응원한다. 또 보고 싶다.


멋지다. 응원한다. 또 보고 싶다



이 리뷰의 제목 ‘말은 총보다 강하다’는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반응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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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뭉치의 에세이 『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도 많이 사랑해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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