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리우드판 <곡성>’ 실제로 보니
여기 한 가족이 있다. 높고 넓은 그들 가족의 집에서는 나뭇바닥이 삐걱이는 소리나 현관문이 끼익 하고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다만 애니 그레이엄이 만드는 미니어처처럼 작고 무력해보이는 그들 가족이 있을 뿐이다. 미니어처 아트를 비추다 그와 똑같은 방에 똑같은 자세로 누워 있는 피터를 비추는 도입부를 보면 그 사실은 더욱 명확해진다. 그들은 누군가가 그린 큰그림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인형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큰그림 속에서 피터는 아주아주 중요한 역할일지도 모른다.
애니의 엄마가 죽고 애니는 생각보다 슬퍼하지 않는 자기 자신에게 놀란다. 엘렌의 죽음은 황망하기는 해도 그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한편 애니의 딸 찰리는 자신의 모든 것과 다름없었던 할머니의 죽음에 충격이 커 보인다. 한번도 울지 않았던, 심지어 태어났을 때조차 울지 않았던 찰리에게 슬픔이 찾아온 걸 보면 말이다. 애니는 찰리의 슬픔에 마음이 놓이지만 찰리는 거듭 붇는다. 이젠 누가 자신을 돌봐주느냐고, 엄마도 죽으면 누가 나를 돌봐주느냐고.
*여기부터는 스포일러일지도 모릅니다
이 시각 엘렌의 빅픽처는 제대로 가동 중이다. 찰리는 떨어져 죽은 비둘기의 머리를 잘라 집으로 가져온다. 그리고는 왕관을 쓴 비둘기의 머리를 그린다. 원형의 불덩이들에 둘러쌓인 엘렌의 환영도 본다. 찰리가 이상행동을 보이자 애니는 파티에 가려는 피터에게 억지로 찰리를 맡긴다. 틱 장애에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 찰리는 파티에서 땅콩이 들어간 초코케이크를 먹고 기도가 붓기 시작한다. 찰리를 태워 병원으로 급히 향하던 피터는 어둠속에서 로드킬 당한 사슴을 보고 급히 핸들을 돌리고, 찰리는 이상한 문양이 새겨진 나무에 머리를 부딪혀 죽는다.
엘렌의 죽음 앞에선 그나마 차분했던 에니는 찰리의 죽음 이후 완전히 변해버린다. 급기야 찰리가 죽는 순간 함께 있었던 피터에게 원망을 퍼붓던 애니는 피터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야 만다. 엘렌이 강제로 피터를 임신시켰다는 것. 자신은 피터를 낳고 싶지 않았다는 것. 유산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어도 기어코 피터가 태어나고야 말았다는 것. 아무리 몽유병이라지만 자신이 잠든 사이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여 자신을 죽이려던 엄마가 이제는 저 따위로 말을 하다니. 성인군자가 아닌 그저 인간이었던 피터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피터와 엘렌의 감정의 골이 점점 깊어지던 어느 날, 그녀의 곁에 아들과 손자를 잃었다는 조안이 찾아와 말벗이 되어준다. 조안을 믿고 의지하게 된 애니는 그녀가 가르쳐준 강령술을 통해 찰리를 부르려 하지만, 의식 이후 집안은 쑥대밭이 된다. 피터는 악령이 자신을 해하려 한다며 으스스한 기운을 느끼고 자해까지 시도한다. 아버지 스티브는 애니의 정신병이 깊어졌음을 느끼고 방법을 강구하려 한다.
*여기부터는 스포일러입니다
이제 애니는 깨닫는다. 엘렌과의 <잘못된 만남>을. 헬렌을 만나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잘못돼 있는 걸”. 왕관을 쓴 엄마 엘렌의 사진 옆에는 조안이 웃고 있다. 엄마의 물건과 비슷한 걸 가지고 있던 조안. 이제야 알겠다. 모든 것을 되돌려야 한다. 찰리의 스케치북에 뭔가 있다. 아들 피터가 눈물을 흘리는 사진이 저절로 그려지지 않았던가. 놀란 애니가 스케치북을 불태우려 하자 그녀의 팔에도 불이 옮겨 붙는다. 이 스케치북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진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애니는 스티브에게 스케치북을 태워달라 한다. 굳이 시너를 뿌려가며. 스티브는 애니에게 병원에 입원하라고 한다. 스티브가 스케치북을 던지자 그는 순식간에 화마에 휩싸여 죽는다. 애니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간다. 이제 애니는 허공을 날아다니고 벽을 탄다. 아들 피터를 쫓는다. 다락방에 올라간 피터는 할머니의 시체와 까만 삼각진 안에 눈알이 파여 있는 자신의 사진을 본다. 그때 슥삭슥삭 소리가 들리고, 피터의 눈에 자신의 양 목을 칼로 찌르는 애니가 보인다. 더 이상 이 모든 걸 견딜 수 없어진 피터는 다락방 창문을 통해 뛰어내리고 악령은 피터의 몸으로 들어간다.
찰리가 내던 “똑” 소리를 내며 피터, 아니 찰리가 깨어난다. 머리가 잘린 애니의 몸이 트리하우스로 가는 걸 보고 찰리도 트리하우스에 오른다. 죽은 찰리의 시체, 그중에서도 머리에 왕관이 씌워져 있다. 찰리의 영혼을 지닌 피터에게 나체의 추종자들이 말한다. “찰리야, 너는 이제 파이몬 왕이란다.” 악마 파이몬의 숭배자들 사이로 경쾌한 음악이 흐르며 영화는 끝이 난다.
자, 이게 이 영화 <유전>의 줄거리다. 극 초반은 엄마와 딸을 잃은 상실감에 몸서리치는 애니의 시선을 따라가며 전개된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의 죽음이 악몽이 되는 건 한순간이다. 악마 파이몬에 미친 할머니 엘렌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를 파탄에 몰아넣는다. 애초에 애니의 아버지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굶어 죽었으며 애니의 오빠는 엄마가 내 몸에 무언가를 넣으려 한다는 유언을 남긴 채 목매달아 죽었다. 강령술로 찰리를 불렀다고 믿었던 애니는 계속 몽유병에 시달리고 피터가 자해를 하자 이내 이 모든 게 엘렌의 빅픽처였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애초에 엘렌은 애니에게 남긴 유서에 “우리의 희생”이라며 ‘우리’를 강조했고, 오빠와 애니, 피터에게 파이몬을 빙의시키려다 실패하고 찰리를 택했다. 애니의 무의식 속에는 그 기억이 남아 있어서 찰리를 부르는 강령술 중간에 겁에 질린 어린 애니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특히 엘렌이 애니에게도 파이몬을 빙의시키려 한 것은 자신이 선머슴처럼 키워졌다고 고백하는 애니의 모습에서도 확신할 수 있다.
파이몬은 찰리에게 빙의돼 있다. 찰리는 악마의 물건들을 가지고 놀며 새의 머리를 자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불구덩이에 둘러쌓여 있는 엘렌의 환영을 본 것도 파이몬이 불을 관장하는 악마이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강하지만(애니와 찰리는 강령술을 하면서 바뀐 공기의 흐름을 파악한다. 반면 영적인 능력이 없는 스티브는 어리둥절해할 뿐이다) 태생적으로 악마 숭배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애니와 피터 대신 헬렌이 숙주로 삼은 게 찰리다. 그러나 파이몬은 가족 중 어린 남자의 몸을 원하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피터를 숙주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선 파이몬이 피터의 몸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도록 피터가 약해져야 한다. 처음부터 파이몬이 피터를 숙주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이상한 낌새를 챈 스티브가 헬렌과 애니의 소통을 막음으로써 그 일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다 헬렌이 병을 얻어 한집에서 함께 살게 되자 찰리를 숙주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찰리는 파이몬의 문양이 새겨진 나무에 부딪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거다. 찰리의 죽음 앞에서 피터는 괴로워하고 정신적으로 허약해진다. 애니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마지막 남은 정신줄을 꼭 붙잡고 있던 애니마저 남편 스티브의 죽음 앞에선 스러지고 만다. 파이몬은 애니에게 불이 붙는 환영을 보여줌으로써 스티브의 손으로 직접 스케치북을 버리게 하고 그를 태워 죽였다. 피터를 숙주로 삼기 전 파이몬은 애니를 숙주로 삼아 그녀의 목을 자른다. 그리고 마침내 찰리의 영혼과 피터의 몸을 차지한 파이몬.
잘나가다 뜬금없이 등장하는 상투적인 결말이 헛웃음을 불러일으키지만 생각해보면 이 이상 어떤 결말을 낼 수 있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물론 파이몬 즉위식은 생략해도 됐을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영화는 초반부터 복선과 떡밥을 잔뜩 깔아놓고 관객이 퍼즐을 맞추는 모습을 재미있게 구경하는 모양새다. 이런 지점에서 '할리우드판 곡성'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 아닐까. 화려한 편집과 치밀한 음향, 배우들의 열연도 무엇보다 빛났다.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고 힘들어하던 입장이었기에 느리게 흘러가는 초반부가 상실의 드라마, 심리스릴러로 보여지기도 했다. 김혜리 기자가 이 영화에 대해 "애도와 저주의 동거"라고 평했던데,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포스터 카피처럼 "욕나오게 무섭"진 않지만 "가족은 선택할 수 없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간담 서늘해질 정도로 무섭기도 하다. 무더운 여름, 한번쯤 시원하게 보기엔 좋을 것 같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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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뭉치의 에세이 『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도 많이 사랑해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