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상>과 버닝썬 게이트

by 김뭉치

나는 모든 일에 좀처럼 확신이 없는 편이다. 그래서 확신에 차 있는 사람을 보면 부러운 한편 무서운 마음도 든다. 저 사람은 어떻게 자신이 옳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어떤 삶을 살면 저런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최근의 버닝썬 게이트를 보면서도 그런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 수사 중이라 언급은 조심스럽지만 본인은 죄가 없다는 승리의 태도를 보면 뻔뻔함을 넘어 섬뜩하기까지 하다. 아직도 본인이 만인의 우상이라 생각하는 걸까?


ⓒ 영화 <버닝썬> 가상 예고편 캡처


영화 <우상>은 버닝썬 게이트와도 맞닿는 구석이 있다. 영화는 꿈과 신념과 확신이 도가 지나쳐 맹목으로 치달을 때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만인의 우상인 구명회(한석규 배우)는 방언인지 외계어인지 알 수 없는 소릴 해도 전적으로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인물이다. 그래서 다른 국회의원에게 "자네, 예수여?"라는 말을 듣기까지 하는 사람이다. 구명회는 아무도 믿을 수 없고 믿지 않기 때문에 모든 범죄를 자신이 직접 저지르고 수습하며 악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감독은 구명회를 보여줄 때 물이나 거울 등 반사와 반영의 이미지를 자주 사용하여 구명회가 어떤 캐릭터인지를 관객에게 보여주려 애쓴다.


거짓은 입으로 퍼진다


이런 명회와 대립각을 세우는 사람이 중식(설경구 배우)이다. 장애가 있는 아들을 끔찍이 챙기는 중식은 혹여 아들 부남을 잃어버렸을 때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아들과 함께 머리카락을 샛노랗게 탈색한 인물이다. 아들의 성욕을 해결해주기 위해 아들의 자위를 돕다가 그만 지쳐 조선족 여성을 며느리로 들이는데, 명회의 아들 때문에 유부남이 된 부남이 신혼여행지에서 죽자 끝까지 아들의 자위를 대신해주지 못한 걸 자책하는 사람이다. 이름처럼 중식(점심식사)만 허겁지겁 채우며 살아간 아들 바보다.


중식만 근근이 채우며 살아갔을 듯한 아들 바보 중식


이들 사이에 부남의 아내이자 중식의 며느리인 련화(천우희)가 있다. 한국인이 아닌 조선족, 남성이 아닌 여성인 련화는 영화 속에서 딱 두 번 웃는다. 중식의 변호사가 5만 원짜리 도시락을 줬을 때, 중식이 혼인신고서를 작성해 한국에서 련화가 계속 살 수 있도록 도와줬을 때다. 부유하긴 커녕 근근이 살아가는 게 최선인 련화의 삶은 비루하고 쓰지만, 그나마 가진 자존심을 지키고 타인과의 약속을 지키려 애쓰는 캐릭터다.


5만 원짜리 도시락을 먹으며 아이처럼 좋아하던 련화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리얼하다 보니 오히려 중요한 신들마다 대사가 들리지 않는다. 천우희는 완벽히 조선족 여성인 련화 그 자체였지만 들리지 않는 대사를 그러모아 영화의 핵심을 유추한다는 건 관객에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나는 아직도 중식의 집에서 식칼을 들고 나온 련화가 중식에게 한 말이 뭔지 모르겠다. 들은 거라곤 "내 가오"밖에 없다).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나쁜 영화라고 매도할 수 없는 건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우상>에서 거울 이미지는 중요하다


<우상>은 명회, 중식, 련화를 통해 한국사회의 우상신봉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지금 우리에게 우상은 있는가.
우리가 우상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는 없는가.
그리고 그 우상은 과연 우상으로 대접받을 자격이 있는가.


우상은 과연 우상으로 대접받을 자격이 있는가.


서슬 퍼런 질문은 때로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요즘이다. <우상>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우리가 주지해야 할 사실. 믿음은 귀를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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