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변혜지의 세계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곳이 있을까.
가난한 나의 영혼을 숨기려 하지 않아도 나를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목마른 가슴 위로 태양은 타오르네. 내게도 날개가 있어 날아갈 수 있을까.
바보처럼 나는 그저 눈물을 흘리고 서있네
이 가슴속의 폭풍은 언제 멎으려나
바람 부는 세상에 나 홀로 서있네.
자우림 - 샤이닝 가사 중 발췌
그녀의 시를 읽었을 때 생각나는 노래였다. 무언가 닮아있는데, 뭐라고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절대로 멸망하지 않을 세계를 살아가는
독자 (讀者) 이자, 독자(獨者)는 결코 아니라는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홀로 가는 자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보라색 향기를 풍겼다.
"세계에 홀로 남겨진 사람이 울거나 결심하지 않았으니까..... 떠나지 않으려던게 아닌데. 하필 잠이 많아서"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중 발췌/ 변혜지/ 문학과 지성사
하필 잠이 많아서라니. 홀로 남겨진 이유가 지나치게 하찮았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이유로 우린 인생의 큰 일들을 치르곤 한다. 거창할 건 하나도 없다.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세상은 그러게 갑자기 큰 뒤통수를 치고는 하니까.
누가 봐도 시 속의 그녀는 혼자인데. 그런데 그녀의 안에 수많은 사람이 보였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충분히 절망해야 하는데. 무릎을 꿇고 주먹을 쥐어야 하는데. 창문 밖에서 쏟아지는 것이 눈인지, 비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불안하게 방안을 서성이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을 알기 전에는 도무지 눈물 같은 것은 쏟을 수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로소 울고 싶은 것이다..... 거울을 보아야 하고, 최대한 아름다운 표정을 지어야 한다. 뺨에 흐른 눈물을 최대한 맛본 뒤에, 눈물의 맛을 적어야 한다. 그러는 동안 눈물을 닦아주려는 자가 뒤에 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경멸하는 자가 뒤에 있을 것이다. 별다른 이유가 없는 눈물을 옹호하려는 자 또 한 있을 것이다. 눈물 흘리는 것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자가 있을 것이다. 멸망한 세계에 너무 많은 자들이 남아있어서 세계는 반쯤 질려버릴 것이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중 발췌/ 변혜지/ 문학과 지성사
나는 이 대목에서 왜 최근에 세상을 떠난 유명 연예인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혼자이지만 사실 많은 이들과 그리고 그들의 눈과 말들 속에서 살아간다. 그것 때문에 저 하늘 끝까지 올라갈 만큼 기쁘기도 하고 저 나락까지 추락할 정도로 아프기도 하다. 그러나 너무나도 사회적인 동물인 나머지, 혼자서만 살아가지도 못하고 끊임없는 연결을 추구한다. 많은 이들의 사랑과 공감을 받던 사람이 그것의 반대되는 질시와 질타, 손가락질과 악플과 눈길을 견뎌내지 못한 것은 그 눈길들로 인해 찬란했던 시절과 대비되는 온도격차에 크나큰 나락을 겪어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홀로 침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누구나. 자신 안으로 깊이 잠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홀로 충분히 침잠하고, 스스로 채워지고 나면 연결되고 싶은 자연스러운 욕구가 생길 때쯤.
그런데 그때쯤 내 곁에 아무도 없으면 어떡하지?
우리는, 그런 불안감 때문에 그렇게 연결에 집착하는 걸까? 핸드폰을 놓지 못하는, 연결을 놓지 못하는. SNS를 떠돌아다니고 유튜브와 온갖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주변의 반응과 뉴스와 소식과 쇼핑을 하는 것은.
멸망한 세계에서조차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어 세계는 반쯤 질려버릴 것이다.
그렇게 만든 가상공간 속의 내가 돌아다니는 커뮤니티는, 그 소식들은, 내가 탐색하는 정보들은
얼마나 허무한가. 그런데 그 허무한 정보 속에 나는 얼마나 파묻혀있고 얼마나 질색해 있나.
저 사람을 아느냐고,
우리 중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물어보았다.
여기에 모인 모두가
그를 사랑했던 적이 있는데
무릎을 꿇고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는데.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없었으므로,
고요한 행진이 영원이 계속되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우리 중 누군가 중얼거렸다.
-원히트 원더 중 발췌/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 변혜지 / 문학과 지성사
시인 변혜지의 시들에는 나와 너무 많은 내가, 그리고 다양한 시각이 살아있다. 그리고 그것을 관찰하는 또 다른 제삼자의 시선은 마치, 하나의 커다란 세계를 관찰하는 듯. 추상화를 그리는 듯. 이렇게 저렇게 카메라를 바꿔 촬영을 한다.
거기에는 더 이상 단순하지 않은, 똑같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많은 정보와 시각을 신경 쓰며 살아가는 요즘세대의 영민함과 산만함이 함께 있다. 그리고 그 안에 깨어있으려는 시인의 절박함이 있다.
각성하십시오. 간절한 사람이 나를 깨우려고 자꾸만 어깨를 흔드는데, 각성하십시오. 내게 뻗어진 손을 잡으면 나는 무한히 늘어납니다. 각성하십시오. 울면서 나를 흔드는 사람을 뿌리칩니다. 각성하십시오. 꿈의 바깥에서, 마음은 왜 자웅동체가 아닙니까?
-테라포밍 중 발췌/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 변혜지 / 문학과 지성사
왜 나는 하나가 아니 인가? 왜 수많은 내가 내 안에 있나.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눈길에 말들 속에 질식할 것만 같다. 멸망한 세계에서도, 그렇게 혼자가 되어버린 세상에서도, 어떻게 아름다운 눈물을 흘릴 수 있나를 생각하며 우리는 셀카를 찍고 인증샷을 올릴까.
뭔가 산만하다. 시인 변혜지의 시는.
뭔가 따끔하다. 시인 변혜지의 시는.
마치 어딘가를 찔리고 만 것만 같다.
너도 그렇지 않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