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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모 May 30. 2021

예민하든지 말든지

본캐와 부캐 사이

 나에게 처음으로 스키를 가르쳐 주신 옆 팀 팀장님을 뵈러 회사에 갔다. 서른이 넘어 처음 스키를 배우겠다고 회사 스키 동호회에 가입했고, 비발디 파크 초심자 코스에서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방법을 배웠다.


 점심으로 맛있는 회, 초밥, 튀김에 이어 맑은 지리탕으로 마무리되는 정식을 얻어먹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그제야 저 아래 깔려있던 나도 모르던 스트레스들이 쑤욱하고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고. 퇴사하지 않았으면 아마 그런 스트레스가 있었다는 걸 모르고 살았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다행히 무엇이든 잘 까먹는 편이라 스트레스가 별로 없었다고. 회사에서 스트레스받더라도, 돌아서면 까먹는 무던한 타입이라 밑바닥에 스트레스를 안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고 말씀드렸더니.


 '지예 너는 오히려 예민한 사람일 거야. 너나 나처럼 안테나가 많아서 여기저기 다 신경 쓰고 하는 사람들은 예민하지 않을 수가 없어.'라고 팀장님이 머리에 안테나가 마구 솟아있는 것을 손가락으로 뾰족뾰족 찔러가며 표현하셨다.


 '너는 일하는 동안에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다 듣고 반응하잖아. 나도 그렇거든. 네가 나랑 비슷한 것 같아서 내 눈에는 보이는데, 너는 원래 타고나기는 그렇지 않을 텐데 그런 것들이 보이기 때문에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중인 거야'라고.


 이제까지 '예민하다'와 나를 연관 지어본 적 없는데, 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철학의 난제들이 '나는 누구인가'로 시작하는 걸까?


 내가 누군지 모르니까, 궁금해서 자꾸 고민해보는걸까?



 

 실제로 나는 전화받고, 메일 쓰고, 매출 분석을 하며 일하는 중에도 뒤에서 진행되는 얘기들이 다 들렸다.

 팀장님이 지금 하시는 전화가 심각한 종류구나, 옆 팀 누구가 지금 프린터기에 문제가 있구나, 지금 상무님 방에 무엇이 필요하구나 등등. 그리고 들리면 당연히 반응할 수밖에 없다. 찾아드리고, 챙겨드리고, 한 마디라도 거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오지라퍼인 것이다.


 진정한 K-오지라퍼라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사실 내 오지랖은 내가 설정한 바운더리 내에서만 작동되는 기제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사람'과 '내 사람이 아닌 사람'이 명확한 나는 적당한 지인 acquaintances 에게는 정말로 무관심한 편이다. 그러니까 타고난 오지라퍼는 아니고, 사회생활형 오지라퍼가 된 것 같다.

 

 물론 나는 인생에 '소심'이라는 태도는 가져보지 못한 외향형 인간이긴 하지만, 외향형+사회생활의 적당함이 쌓여 '사회생활 만렙'의 부캐를 얻게 된 듯.


 그리고 그 어느 접점에서 '예민함'이라는 특성을 획득한 것 같다. 85%의 나는 대체로 무던하고, 뭉툭하지만, 15%의 나는 굉장히 예민하고 세심한 것 같달까.




 오랜만에 만난 회사 동료도 이런 얘길 했다.

 '안 심심해? 나가서 놀고, 사람 만나야 되는 성격이잖아.'


 '아니야. 나 집에 조용히 혼자 있는 거 너무 좋아. 고요하고 행복해. 물론 친구도 만나지. 근데 그런 건 주에 한두 번이면 되잖아'


 '남들이 보는 나'와 '정말 나'의 경계는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팀장님을 만난 후, 나는 조금 고민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그러나 곧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깨달았다.


 나와 인생은 무수한 나의 단편과 취향으로 탄생하는 복합체니까, 이런 나(본캐)도 있고 저런 나(부캐)도 있어서, 인생이라는 신비로운 우주를 꾸려나가는 거니까.

 내가 누군지 고민할 시간에, 주어진 나를 사랑하면 되겠다고 결론내렸고, 감사하게도 나는 내가 참 좋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마음이 넉넉하고, 여유롭고, 또 따스하다. 베푸는 걸 좋아하고, 맛있는 건 꼭 나눠먹어야 하는 편이다. 그리고 예쁘고 귀여운 것을 본능적으로 사랑한다. 다양한 색채에 마음을 뺏기고, 고운 언어에 마음이 일렁인다.


 가끔 덜렁대고, 호들갑도 잘 떨고, 정체불명의 막춤도 잘 춘다. 남편의 잔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때가 많으며, 내 멋대로인 이상한 청결 강박도 있다. 그리고 종종 하고 싶은 말만 해서, 간혹 남편과 가족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도 있고. (그럴 때는 항상 후회한다)




 이 글을 시작한 건 4월 인데, 5월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맺는 이유는, 이제야 마음 속에서 '내가 누구인가' 결론을 지었기 때문이다. 아주 다양한 내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나의 인생을 써내려가고 있다고. 모든게 나다. 세상 착한 나, 조금 착한 나, 질투하는 나, 예민한 나. 여러 상황마다 조금씩 다는 나(페르소나)가 필요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이든지 간에,

 퇴사를 하고 3개월이 지난 지금,

 내가 아주 행복하다는 것이다.


 나의 성격, 캐릭터,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

 건강한 자존감의 내가 풍족하게 행복하다.


 백수의 참 행복과 참 평화를 빈틈없이 누리는 나는 남편과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와 방파제가 있는 천운의 백수다.


 나의 남편, 병둥이는 얼마 전에 '평생 나의 방파제가 되어주겠노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냥 언제나 천진난만하게, 예쁘고 귀여운 것이나 좋아하고, 어려운 건 전혀 모르고 평생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물론 나는 조금 감동한 후, '세상 풍파를 다 막기에는 방파제가 너무 작은데?' 라며 그의 작은 키를 놀렸지만. (미안 여보 - 당신 놀리는게 내겐 세상 재밌는 일이야)



 월요일 아침이 평화롭고 고요하다.

 지각할세라 뛰어가서 정신없이 매출을 보고, 주간 보고를 작성하는 아침은 없다.


 낮에는 나만의 애프터눈티 세트를 꾸려서 차와 스콘을 음미하고.

 '아이구, 내 팔자가 상팔자구나, 상팔자'하면서 내 팔자를 기특해한다. 살다살다 팔자를 기특해하는 날이 올 줄이야. #하나님감사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즐겁게 일해봤기 때문에

 더욱 진하게 다가오는 백수의 행복 -


 예민하든지 말든지-

 조심성이 있든지 말든지-


 뭐가 대수랴.


 본캐와 부캐를 모두 벗어던지고

 그냥 오늘 하루를 가볍게 살자.


 나와 내 주변의 것을 조금 더 소중히 여기되, 무겁지는 않게. 사뿐하게 걸으면서 행복하게 지내자.


 여러분,

 백수가 이렇게 홀가분하고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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