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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요일 또는 예술가 Dec 10. 2022

우산

오늘 비 예보가 있었어. 

뉴스를 보던 주인이 나를 가방에 쑤셔 넣었어. 지난여름 내내 가물어서 나는 목이 말랐어.

햇빛이 내 살을 파고들 때면 온몸을 두드리던 빗방울마저 그리울 정도였지.

어쨌든 지금은 어둡고 좁은 가방 안이지만 곧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 가방이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것으로 보니 주인은 지하철역으로 걸어가고 있나 봐.

멀리서 차들이 달리는 소리에 사람들의 말소리, 웃음소리가 섞여서 들렸어.

주인은 비가 오면 나를 자랑스럽게 펴고 여덟 개의 팔로 지탱한 짱짱한 나의 몸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내 피부를 바라보곤 했어. 난 키가 크지도 않고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표준형이야. 그리고 요가를 많이 해서 몸을 부드럽게 접을 수도 있어. 몸을 삼등분해서 주인의 손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아질 수도 있거든.

하지만 그것도 옛날 말이지. 요즘의 내 모습은 내가 봐도 속상해. 햇빛으로 그을려 군데군데 터진 데가 조금씩 미어져 가고 있어. 몸을 지탱한 살 중의 두 개가 지난여름 바람에 날려 꺾여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보여. 나이가 들어간다는 걸 실감하고 있어. 주름진 내 모습을 보는 게 시간이 갈수록 힘들어. 게다가 요즘은 빗물이 튕기지 않고 스며들어서 물방울까지 맺혀.

더 심란한 건 주인이 나를 보는 표정이야.



주인을 만난 첫날. 마침 비가 내렸어.

나를 향해 달려오는 저 날카로운 이빨들을 사람들은 비라고 하더군.

처음 만난 녀석인데 단단하기가 칼날 같더라. 몸을 뚫을 듯이 직선으로 내려와 살을 파고들었어.

아야. 나와 비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어.

자르르 윤이 나는 까만 내 피부를, 그놈은 심하게 긁었어.

“야, 나도 나지만 너도 대단하다.”

신나게 놀다가, 먼저 지친 비가 그렇게 말하고 떠났어. 조금 후에 비가 그치더군.

그날부터 나는 주인의 비를 막아주기도 하고 햇빛을 가려주기도 했어. 아, 나는 겸용 우산이거든, 뜨거운 여름 햇살이 나를 지질 듯이 다가오면 나라고 왜 안 무섭겠어?

“무서워. 뜨겁다고.”

아기 때는 나도 칭얼거렸어.

“이렇게 익어가는 게 우산의 일생이란다.”

“이러다가 저, 다 타버리는 거 아닌가요?”

“여태 나를 만나 타버린 우산을 보지는 못했단다.”

그래도 그해 여름에 만난 태양은 엄마처럼 마음이 따뜻했어. 다시는 그런 태양을 만나지 못했거든. 대부분 퉁명스럽고 이죽거리고 심술 사나워 얼굴에 상처를 남기곤 했지.

비도 무섭기는 매한가지야. 몸이 타버릴 것 같지는 않아도 한기가 스며 늘 콜록거리곤 했어. 더운 여름의 비는 너무 세차서 몸이 아프고 가을이나 겨울의 비는 온몸을 차갑게 만들어.

추우나 더우나 위험에 노출되는 게 우산의 숙명이라면 견딜 수밖에.


주인의 습관은 걸어가며 내 몸을 돌리는 거야. 빗물이 내 몸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걸 좋아하는 거지. 어지럽지만 주인이 좋아하니까 참을 수 있어. 하지만 이제 막 만나 이야기하고픈 아기 빗물과 이별하는 건 슬퍼. 우리는 서로 손을 잡다가 미끄러지며 헤어졌어. 인사도 끝맺지 못하고 헤어지는 아픔을 알게 되었지.



그날 오후 주인은 친구와 만났어.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신 후에 둘은 다이소로 들어갔지.

주인은 망설임 없이 우산을 파는 곳에 섰어.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키가 큰 우산 중에서 고르기 시작했어.

“이거 어때? 이제 칙칙한 것보다 좀 환한 게 끌리네?”

주인은 분홍빛 우산을 펴고 습관처럼 빙그르르 돌리고 있었어.

“그래, 날도 꾸물거리는데 색이라도 환해야지. 그거 괜찮다.”

친구가 맞장구를 치자 주인은 만족한 얼굴로 계산대로 갔지.

“혹시 여기 쓰던 우산도 버릴 수 있나요?”

점원이 주인이 가방에서 꺼낸 나를 덤덤하게 바라보더군.

“이리 주세요. 버려 드릴게요”

점원은 쓰레기들을 모아놓은 봉투로 나를 던졌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안녕’이라고 인사를 할 시간도 없었어.

하필이면 그 안에 있던 살이 부러진 우산에 얼굴을 다쳤어.

주인은 계산을 마치고 새로   분홍 우산을 들고 나갔어.

내가 본 주인의 마지막 모습이었고 슬퍼할 시간조차 충분치 않았어.

나는 곧 쓰레기더미에 싸여 분리수거통으로 나갔거든.

얼핏 다음 주부터 장마가 시작된다는 뉴스를 들은 것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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