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세계에이방인 Oct 21. 2024

가끔은 준비없이

부산썸머비치 울트라 50K

꽤나 오랫동안 쉬었다. 여전히 발의 통증은 가시지 않는다. 짜증 나게 아프다. 낫기는 하는 걸까. 4월 대구국제마라톤 이후로 거의 쉬고 있다. 부상의 여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깊은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해도 능률은 오르지 않고 하면 할수록 더 뒤처지는 거 같고 일상뿐만 아니라 삶 전체에서 아주 깊고 깊은 슬럼프라는 늪에 빠져 있었다. 방법은 없다. 어떻게든 스스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긴긴 더위가 이어져가고 있던 8월의 여름. 대회 2주를 남겨두고 무작정 신청을 했다. 그동안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 상태. 그런데 굳이 해야 될 이유가 있었을까. 어떻게든 되겠지란 막연한 기대는 아니었다. 어떻게 라도 움직이지 않은 이 늪에 빠진 채로 영영 끝나버릴 거 같은 공포와 답답함 때문이었다.



오랜만의 출격. 여행자의 마음으로 홀로 여행을 떠나본다. 적당히 짐을 챙기는것도 쉽지 않다. 몇번을 가방을 채웠다 풀었다를 반복. 결국 대충 쑤셔넣고 기차역으로 출발 한다.

2024.08.16 토요일 저녁에 출발하는 울트라 마라톤 대회이다. 매년 여름 8월에 열리는 대회로 2012년에 처음으로 완주한 울트라 마라톤 대회이다. 12년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역시 나는 러너(runner)가 아닌 여행자의 마음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때와 다른점은 올해는 100km가 아니라 50km란 것이다. 거리는 줄었다곤 하나 부상의 여파와 깊은 슬럼프로 달리기를 거의 하지 않은 현재의 상태로는 2시간 이상 달리기 조차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가는 이유는 역시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벗어날수 없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오는 부산역. 굉장히 덥다. 요즘 여름 날씨에 한낮의 오후 거리를 걷는다는건 굉장히 곤욕스럽다. 역을 나오자마자 뜨거운 햇빛과 뜨거운 공기에 땀에 흠뻑 젖는다.


출발지이자 골인지점인 부산요트경기장. 출발 세시간 전에 도착했다. 번호표를 받고 휴식을 하며 기다린다. 새벽까지 달려야 하기에 평소에는 이 시간에 먹지 않을 커피도 한잔 하고 에너지 음료도 마셔둔다. 잠이 오기전에 끝낼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보다 제법 많은 참가자들이 있었다. 다들 동호회니 크루니 삼삼오오 모여서 참가를 했나 보다. 혼자

쭈볏쭈뼛 서있다보니 실감이 난다. 이 낯설음. 오랜만에 느껴본다. 이번엔 고작 50km 이지만 결코 쉽지않은 거리다. 5시간대에 들어오고 싶으나 아직은 준비가 안된거 같다. 잠이 오기전에만 끝냈으면 좋을거 같다.

서서히 해가 떨어지고 있지만 더위는 여전했다.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시작되는 달리기. 울트라 마라톤의 매련인거 같다. 

드디어 출발선. 카운트 다운과 함께. 달려나가는 인파에 휩쓸려 나간다. 발이 어느지점까지 버텨줄지가 관건이다. 코스는 시민들이 이용하는 산책로가 포함되어 있다. 고로 조심히 앞을 잘 보면서 피해 가야한다. 이것이야 말로 써바이벌! 우르르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며 산책 중이던 시민들은 의아한 표정을 짖고 있다. 가끔 보이는 응원해주시는 동네 러너분들, 불만을 토로하는 분들. 국제 마라톤 같이 메이져한 대회가 아니다 보니 그 어떤 환호나 응원 같은건 없다. 그야말로 마이너 중에서도 마이너한 울트라마라톤의 세계. 나는 이런 마이너한 분위가가 좋다. 



날은 어두워지고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첫번째 cp를 지난다. 완만하지만 긴 오르막이다. 곧 임도 구간이 나올거 같다. 이번엔 특이 하게도 임도구간이 포함이 되어있다. 트레일 러닝 대회에서는 임도구간(비포장도로)이 포함 되어있지만 로드대회인 울트라에서 임도 구간이라니. 등산은 아니지만 어찌됐는 산을 오르게 됐다. 차가 지나갈수 있는 정도의 도로라 등산이라 할순 없지만 산은 어쩔수 내리막보다 오르막이 더 많다. 앞서가는 선수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다. 그 흙먼지를 뚫고 지나간다. 내 후미에 선수들도 내가 일으키는 흙먼지를 뚫고 오고있다. 너나 할거없이 모두 고생하고 있다. 

어둡고 깜깜한 길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달려간다. 헤드랜턴의 불빛만큼의 시야. 왠만큼 숙련되지 않다면 마음껏 내달릴수 없다. 나는 멈추지 않을정도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2m앞의 불빛만 보며 달린다.


약간의 공포스럽던 임도구간이 끝나고 다시 도로가 나왔다. 가로등이 환하게 밝혀주니 어둠에 대한 공포는 가라앉았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울트라레이스의 시작이다. 깊은 밤시간. 잠이 들 시간에 나는 또 이렇게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세번째 CP.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 코스. 아껴두었던 진통제 하나를 먹었다. 스멀스멀 발의 통증이 올라고있다. 약을 먹는 다고 안 아플거란 보장은 없지만 일단 먹어둔다. 어두운 도로위 덩그러니 가로등 불빛만이 길위를 비추고 있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 중이지만 왔던 길이 맞는지 계속해서 헷갈린다. 앞뒤 주자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이럴때는 어쩔수 없이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는게 낫다. 알바를 하느니 천천히 가는게 좋을거 같다. 뒤에 따라오는 주자들을 보며 안심하며 천천히 나를 앞질러 가도록 기다려준다. 길치 여행자에겐 길잡이가 있는 편이 좋다. 

아무리 앞 주자를 보고 딸라간다고 해도 결국 나의 페이스에 맞아야 한다. 점차 벌어지더니 앞주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뒷 주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천천히 걷고 멈추고를 반복. 슬슬 발의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한다. 뛰다 걷다를 반복하다 멈춰 버렸다. 발을 딛을 수가 없다. 이럴때는 어쩔수 없다. 진통제도 안 통한다. 버텨애 한다.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마라톤과 달리 울트라는 거리가 더 길다. 기다리고 버티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다.

통증과 전투를 벌이는 와중 코스는 번화가로 들어섰다. 깊은 밤을 넘어 자정이 넘어가고 있다. 수많은 젊은 남여가 길거리로 술집으로 클럽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인파를 헤집고 앞으로 가야한다. 인생을 즐기는 전혀 다른 두 집단의 접점. 우리가 그들을 굼금해 하지 않듯 그들도 우리를 굼금해 하지 않는다. 서로 각자의 방식대로 즐기고 있다. 뜬금없이 번화가를 달리는 러너들도, 번화가에서 즐기는 젊은이들도 서로에 대해선 전혀 신경쓰지 읺는거 같다. 사람은 자신과 다른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불필요한 자극에 대해서 뇌가 알아서 차단하는 것일수도 있다. 무덥고 습한 공기 속에 끈적한 땀 냄새와 진한 향수의 향기가 한데 썪여서 코 안을 찌른다. 굉장히 이질적이다. 이 공간에선 나는 이방인이다. 물과 기름 같이 섞일 수가 없다는걸 느낀다. 복잡하고 혼란한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 그럴수록 더욱 길을 헤매고 있다. 정신이 어질하다. 발은 더욱더 아파져 더이상 달릴수도 없다. 이제부터는 버티는 수밖에 없다. 회복되기를 바라며 걷고 또 걷는다.



번화가를 벗어나 한적한 도로를 달려간다. 마지막 CP를 지났고 이제 피니시만 남았다. 대략 10km 정도 남은거 같은데 도무지 뛸수가 없다. 수많은 주자들이 추월해가지만 따라갈 기운도 없고 발이 움직이지를 않는다.빨리 끝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포기하고 싶어도 여기서는 어쨋든 피니시까지 가야된다. 남은 에너지젤도 없고 박카스 젤리를 씹으며 하염없이 걸었다. 생각 없이 걷다보니 어느새 출발할때 지나왔던 길로 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 끝이 보이는구나. 천천히 뛰기 시작하니 달릴만 하다. 역시 끝이라고 생각하니 몸이 움직여 지는거 같다. 결국 생각이 몸을 지배한다는 말이 어느정도 일치하는 부분은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다.

역시나 그렇지만 마지막 순간에도 알바를 했다. 코스이탈은 이제 기본 옵션인거 같다. 마지막 피니시를 향해 달리며 앞주자들이 피니시 라인에서 사진 촬영을 한다. 매너있게 한참 뒤에서 천천히 골인을 했다. 어차피 이미 기록 따윈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4월 대구마라톤 이후 족저근막염으로 고생을 하며 준비 없이 막연히 출전한 대회라 갖은 고생을 경험하며 힘겹게 피니시를 했다



여러모로 많이 아쉽지만 6시간은 넘기지 않아서 나름의 성과는 있었던거 같다. 아마 다시는 오고싶지 않을거 같다. 보급도 주로도 코스도 썩 매력있는 대회는 아니었다. 보급이라도 잘 되었다면 나았을 건데, CP 운영도 별로였고 코스는 번잡한 번화가를 수많은 인파를 피해 간다는게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그리고 너무 습하고 덥고 괴로웠다. 그럼에도 굳이 이 대회를 나오게 된건 9월에 있을 올 시즌 첫번째 울트라 트레일 레이스 때문이었다. 급하게 연습겸 준비도 없이 나와서 호되게 스스로에게 당해버린 꼴이 되었지만 고생한 만큼 정신도 몸도 다시 움직일수 있는 여력이 생긴거 같다.


한밤중 부산. 오갈데 없는 여행자는 역시 안락한 PC방에서 밤을 지세운다. 어쨋든 이번에도 무사히 잘 마무리가 되었다.


#러닝 #울트라마라톤 #달리기 #부상 

매거진의 이전글 최선을 다했다는 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