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Trans JEJU 100K 후기 - 1
마지막 CP를 지나고 드디어 도로가 나왔다. 출발지에서 올라왔던 그 길이다. 이제 피니시에 거의 다달았다는 뜻이다. 긴긴 내리막을 따라 내달렸다. 이대로 피니시까지 이어질 거다. 그런데 경로 표식들이 보이지 않는다. 안내원들도 보이지 않는다. 역시 오늘도 *알바를 했다(*알바는 코스이탈을 뜻하는 용어다).
나는 길을 잃었다.
10월은 러닝의 계절이다. 유독 많은 대회들, 특히 메인 대회들이 10월에 몰려있다. 마라톤 뿐만 아니라 트레일 러닝도 마찬가지다. 그중 '트랜스 제주'는 꽤나 인기가 높은 대회 중 하나다. 일단 제주도라는 장소가 굉장히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2023년 올해부터 국내 처음으로 트랜스 제주 대회가 UTMB 시리즈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UTMB란 마라톤으로 치자면 보스턴 마라톤 격 이다. 가장 권위있고 오래된 마라톤 대회인 보스턴 마라톤은 기록으로 참가자격을 준다. 여행사를 통해 돈만 내면 참가권을 얻을수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하는건 자격이 있어야 참가할수 있는 러너들에겐 상당히 긍지가 있고 꿈의 무대 중 하나이다. UTMB가 바로 트레일 러너들에게 꿈의 무대이다. 프랑스 샤모니에서 시작하는 UTMB에 가기 위해선 인덱스 뿐만 아니라 추첨권인 스톤을 입수 해야한다. 인덴스는 트레일 러닝의 난이도(거리+상승고도)에 따라 쌓이는 포인트다. 인덱스는 꾸준히 대회에 나가서 완주를 한다면 쌓을수 있다. 문제는 추첨권인 '스톤'이다. 반드시 스톤이 있어야만 UTMB에 참가할수 있는 추첨을 할수있다. 스톤을 많이 모을수록 당첨 확률이 올라가는건 당연한 사실. 이 스톤은 UTMB 시리즈에서만 얻을수 있다. 고로 무조건 해외대회에 참가해야 한다는것이다. 작년까지는. 2023년부터 트랜스 제주가 UTMB 시리즈에 들어오면서 스톤을 획득할수 있는 기회가 생긱 것이다. 꼭 해야할 이유가 생겼다. 참가신청부터 쉽지 않았다. 다행히 100K 부분에 등록하게 됐다.
이런 이유로 트랜스 제주는 좀더 특별한 대회가 됐다. 해외가 아닌 국내에서도 UTMB로 갈수있는 길이 생겼으니 말이다.
2023 10월6일
반차를 썼다. 오전 근무를 마무리 하고 대구공항으로 갔다. 오랜만의 비행기. 제주도. 그리고 떨림. 스스로에게 자문해본다.
준비는 잘 했나?
9월은 한달 최고누적 거리를 세워보려고 했다. 지금까지 중 가장 긴거리를 누적했다. 하지만 부족하다. 울트라 러너라면 좀더 긴거리를 달려야만 한다. 달릴수 있어야 한다. 아직 나는 장거리(마라톤 풀코스 이상 거리)를 달릴수 있는 몸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기존의 가지고 있던 부상들. 왼무릎의 통증, 등 허리의 통증, 그리고 장경인대의 통증. 완벽하진 않지만 거의 해결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다만 다른 잔부상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시간과 거리가 누적되면서 그만큼 몸의 데미지도 누적된다. 부상은 아직까지 내몸은 그 데미지를 소화할수 없는 몸이란 거다. 날이 갈수록 시간과 거리가 줄어든다. 짧게 여러번 달려서 거리를 누적시켰지 한번의 긴거리를 여전히 소화하지는 못했다. 제주도, 한라산이라는 설램이 큰 만큼 불안과 두려움도 커져갔다.
여전히 나는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오랜만의 비행기. 전투력 상승을 위해 대회전에 꼭꼭꼭 읽게 되는 소설.
내 나름의 마인드 컨트롤이다.
제주도의 날씨가 심상치 않다. 대회 당일은 비가 올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자 바삐 서귀포행 버스를 찾았다.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면 쉴시간이 없을거 같다. 트랜스 제주는 대회전날 선수등록을 해야한다. 레이스빕 외 기타 기념품을 선수등록시 받을수 있다. 장비검사를 받고 선수등록을 완료했다. 참가선수들과 함께온 팀, 가족들이 많이 보인다. 이번에 UTMB 시리즈에 들어가면서 외국인 선수들도 상당히 많다. 이방인이 된 느낌이다
2023.10.07
새벽4시. 눈을 떴다. 늘 하는 나만의 의식을 치른다. 몸을 깨끗하게 샤워를 한다. 평소에는 하지 않는 드라이기로 머리를 정성껏 말린다. 단정히 개어놓은 속옷과 러닝 팬츠와 러닝 티셔츠를 입니다. 발을 꼼꼼히 말리고 테이핑을 한다. 신중히 양말을 신고 정성껏 러닝화의 끈을 조인다. 새벽의 추위를 생각해 얇은 바람막이를 입는다. 미리 정리해두 가방을 매고 3번이나 방을 체크한다. 강박처럼 체크리스트를 되짚어본다. 일종의 자기통제다. 내가 통제 할수있는 것에 더 집착한다. 불안에서 오는 습관이다.
다행히 날씨가 차갑지 않았다. 공기가 습기를 머금은 듯 무거운 느낌이지만 포근한 기운이 든다. 대회장으로 걸어가는 길. 시계는 없다. GPS도 없다. 안내 표식들만 보고 앞으로 달린다. 이게 오늘 계획이다. 시간 계획 같은건 없다. 몸이 움직이는 만큼 달린다. 목표는 완주를 넘어 10월 7일 24시전에 들어오는 거. 그냥 희망사항일뿐이다. 24시간안에 골인하는게 진짜 목표다. 하지만 언제든 생존모드(완주모드)로 바뀔수 있다. 끝까지 버텨주길 바랄뿐이다.
될때로 되라.
출반선 뒤에 서면 떠오르는 생각. 이 길로 다시 들어올수 있을까. 걱정이 지나쳐 두려움 마저 생긴다. 하지만 돌이킬수 없다. 출발선에 서있다. 도망 갈곳은 없다. 선택지는 하나다. 출발선 너머의 세계도 달려 가는 수밖에 없다. 결과나 과정이야 어떻게 되든 나는 나를 낯선 세계에 던져 놓는다. 독수리는 자신의 새끼를 아래로 떨어트려 나는 법을 알려준다. 나에겐 나는 법을 알려줄 멘토가 없다. 스스로를 가혹한 환경에 던져넣는 수 밖에 없다. 능동적인 고통을 준다. 그것을 도전이라고 부른다. 무식해 보인다. 이것이 나를 성장시키는 방법이다.
출발. 더이상 생각이고 뭐고 필요없다. 휩쓸리지 않기 위해선 앞으로 뛰어가야 한다. 내 페이스를 찾아야한다. 평정심을 유지한다.
#고통 #트랜스제주 #달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