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테리 May 08. 2021

2. 친한 형이 컨닝을 제안했다(下)

헌병은 서서 생각한다

공군은 육군보다 복무기간이 3개월 더 길지만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근무하고 휴가가 더 많다는 장점이 있다. 말하자면 더 오래 있는 대신 높은 확률로 몸이 더 편하다. 그러나 훈련 기간은 그렇지 않다. 공군 훈련소는 논산보다 길고 빡센 걸로 익히 알려져 있다. 그렇게 고된 신체 훈련을 거치고 나면, 마지막 주에 특기시험이라는 걸 봐야 한다. 특기시험은 공학적 지식, 국어, 영어, 수학 능력 등을 측정하여 점수에 맞게 특기를 결정하는 자료로 활용된다. 정확한 배점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특기시험이 총점에 100점 정도 반영된다면, 전공점수가 1000점 반영되는 식으로 사회에서의 전공이 압도적인 지표로 사용된다. 그러나 군대에서 활용되는 몇몇 특수한 전공들, 예컨대 공고나 공대 출신 등이 유리한 부분 외에 나 같은 문과, 대학생에겐 그나마 경제 직렬이 아니면 전공 점수는 0점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해당 전공을 가지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 특기시험의 경쟁은 치열한 편이다. 특기시험은 토익처럼 영역별로 풀 수 있는 시간이 나누어져 있고, 보통 문과 대학생이 손댈 수 있는 영역은 풀이시간을 짧게 설정하여 난이도를 조절한다.


특기시험을 하루 앞둔 전날 밤, A는 내게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특기시험 때 나눠서 풀고 서로 보여주자.”

 

“어?”

 

“내 친구들도 다 이런 식으로 해서 OO 특기 받았대. 이렇게 해야 남은 2년 편하다 너.”  


“......”

 

“대학에서도 원래 다들 하지 않냐? 뭐 어때.”


“아 그래도 좀 그런데... 좀만 생각해볼게.”


“알겠어, 대신 빨리 결정해라.”


빨리 결정하라는 A의 말 끝에는 뭔가 이전에는 없었던 단호함과 불편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순간 망설였던 것이 사실이다. 특기시험 또한 어차피 순응할 생각이 없었던 군대의 자잘한 규칙들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조직의 권위에 미시적으로 저항하고자 했던 내게 흥미로운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정치학을 비롯한 유관 학문에서는 미시적 저항과 관련하여 여러 논의가 있다. 미국의 정치학자 제임스 스콧은 『약자의 무기』에서 미시적인 농민의 저항을 분석한 바 있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장기적으로 농민들에게 유의미한 투쟁수단은 죽음이 예정된 대대적인 반란이나 폭동이 아니라, 은근한 의무 불이행, 고의적 지연 등이다. 이념투쟁과 관련해서도 전면적으로 지배적 가치와 대립하기보다는 가치의 전유, 제스처 등을 통해 미시적인 행동 규범들을 잠식해나간다. 


이는 비단 협의의 정치학만의 분석은 아니다. 조직의 구성원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행정학 분야인 인사행정에서도 이와 유사한 게릴라 임플로이(Guerilla Employees)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이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의 행동/목표를 방해하는 경력직 공무원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업무 지연부터 실수하기, 정보누설 등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조직의 목표를 방해하는 행위를 하는 구성원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예로는, 1940년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대사관 외교관이었던 스기하라 지우네(杉原 千畝)가 일본과 소련의 지령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유대인들에게 비자를 발급해주었던 사례가 있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물건은 항상 왼손에 파지해야 하고, 대각선으로 걸어선 안 되며, 존경할 수 없는 상급자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고, 머리는 빡빡 밀어야 하며, 쉬는 시간에도 누워 있어서는 안 되고, 이불과 수건, 전투복은 각을 재서 정리해야 하며, 건물 간 이동할 때는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고 4명을 모아야 했던, 그런 종류의 규칙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비교적 쉽게 잠식되기 마련이다. 이런 종류의 예식들은 애초에 보이는 곳에서 감시하고 강제할 뿐, 순전히 개인적인 순간까지 지켜질 것이라 기대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하자는 제안은 군대의 권위만이 아닌, 보다 큰 범주의 규칙을 어길 것에 대한 요구이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 비슷할지라도, 실상 전혀 다른 것이었다. 병사들이 휴가신고 전에 당직사관의 두발검사를 피하기 위해 모자 속에 머리카락을 숨기기는 해도, 없는 휴가증을 위조해서 행사하지는 않는다(아마도). 후자는 군대의 규정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보편적인 윤리까지 위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기하라 지우네처럼 극단적인 예외상황이 아니라면, 부정행위는 '작고 정당한' 저항이 될 수 없다. 


나는 결국 제안을 거절했고, 특기시험은 망했다. 그래도 영어 영역은 용케 만점을 받았는데, 대대에서 나 포함 8명의 영어 만점자가 있었고 그중에서 6명을 좋은 보직으로 선발하는 과정에서 나는 다른 점수가 낮아 최종 선발될 수 없었다. 나랑 같이 떨어진 한 명은 결과 발표가 있었던 강당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A는 결과적으로 좋은 특기를 얻어냈다. 어차피 전공 점수도 있었던 A는 내게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어도 잘 풀렸을 것이다. 


나는 가끔 그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그래봤자 내가 잘 풀었던 건 영어뿐이니, 외고를 졸업한 A에게 도움이 되어봤자 얼만큼 되었겠는가. 되려 다른 영역에서 A의 점수를 깎아먹었을 지 모른다. 웃픈 상상이다.  A의 제안으로 인해, 그리고 나의 거절로 인해 친한 형 동생 사이는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았다. 이건 조금 슬픈 일이다. 나는 끝내 좋은 특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영어 만점은 기분 좋은 일이었고, 중요한 결정을 잘 내렸다는 편안함도 느꼈다. 나는 그렇게 공군 3대 기피 보직인 헌급방(헌병, 급양, 방공포) 중 ‘헌병’ 특기를 받았다.


*공군은 자대에서 야구모자 같이 생긴 모자를 착용합니다. 계급장이 박혀 있습니다.

*공군의 BX는 육군의 PX와 같은 뜻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1. 친한 형이 컨닝을 제안했다(上)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