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 1조로 구성된 정문 초소 근무는 선임과 후임의 협업 체계이다. 선임은 매뉴얼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지며, 후임은 매뉴얼에 따라 출입자와 정문을 통제한다. 헌병 일반의 업무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담당하는 행정학교에서는 예비 헌병들에게 정문 초소 업무의 매뉴얼을 가르치지만, 공식적으로 정해진 내용은 오직 전체로서 통합된 매뉴얼일 뿐이다. 다시 말해, 선임과 후임으로 나누어진 업무 매뉴얼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따라서 현장의 업무는 부대의 사정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분배된다.
모든 상황에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을 만드는 것의 어려움을 고려한다면, 이는 현장에서의 원활한 실행을 추구한 당연한 결과이다. 이러한 점에서 헌병 업무의 매뉴얼이 작동하는 방식은 사회 전반에서 규칙이 작동하는 방식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나라의 법 체계가 헌법-법률-시행령-시행규칙-조례 순으로 구성되듯, 가장 구체적인 수준의 규칙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상위 법령에 근거하여 현실에 적합한 하위 법령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정문 초소 근무에서 선임과 후임의 업무 분담에 관한 규칙은 어떻게 구성되는 것이 적절한가.
적절한 업무 분담 규칙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체적인 규칙이 정해지기 이전의, 일종의 정문 초소의 ‘자연상태’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실로 자연상태에 대한 상상은 이론적인 전제로서, 구체적인 정치제도를 구상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대표적인 근대 정치철학자들, 예컨대 홉스, 로크, 루소 등은 사회계약론을 주장하며 각자 나름의 자연상태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가장 익숙한 설명은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상상은 동양의 정치철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사상가들이 대표적인데, 맹자, 순자, 노자 등은 각자 성선설, 성악설에 기초하거나, 무위(無爲) 등을 전제로 삼아 이상적으로 나아가야 할 정치 형태에 대해 논했다. 서울대학교 정치학 전공의 김영민 교수는 저서 『중국정치사상사』에서 전국시대 사상가들이 제시한 ‘전-정치상태’를 언급하며, 각 사상가들이 초기에 설정한 자연상태에 근거하여 궁극적으로 어떤 정치상태를 주장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이처럼 한 국가의, 혹은 국가 일반의 바람직한 정치 제도를 제시하고자 했던 사상가들의 지혜를 빌린다면 정문 초소의 ‘자연상태’는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홉스의 자연상태
정문 초소 근무에 관한 대원칙만 존재할 뿐, 어떤 구체적인 규칙도 없다고 생각해보자. 입대 기수와 계급을 권위의 원천으로 하여 선임과 후임은 처음부터 위계적인 관계에서 업무를 시작하게 된다. 초소는 간부의 일상적인 개입 없이 대체로 독립적인 공간이며, 이기적인 개인은 단기적인 욕구 충족을 추구한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임은 최대한의 업무를 후임에게 부과하고, 최소한의 업무만을 수행하려 할 것이다. 그 최소한의 업무란, ‘열어줘’ 혹은 ‘열지마’에 대한 판단일 것이고, 그 외의 모든 업무들, 예컨대 출입자 확인, 정문 개폐, 전화 업무 응대, 5분 대기조 순찰 응대 등은 후임의 몫으로 돌아갈 것이다. 결과적으로 후임은 필요 이상의 업무를 맡게 되고, 선임은 필요 이상의 편의를 누리게 된다. 물론 어떤 선임은 예외적으로 ‘아량’을 베풀어 최소한도 이상의 업무를 맡는 시혜적 태도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이 역시 진실로 정당한 업무의 분배 방식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스럽게 혹자가 말한 격언을 상기시킨다.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
규칙이 없는 전-정치상태, 자연상태는 자유롭지만 그러한 자유는 약자에게 억압일 뿐이다. 그러나, 계급이라는 상징으로 뚜렷하게 나누어진 위계적인 공동체 내부에서, 후임들이 결속하여 새로운 규칙의 제정을 요구하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개개인의 후임 입장에서 우월 전략은 선임과 친밀도를 높여 시혜적인 업무분담을 이끌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지만 불온한 혁명을 감당할 각오가 된 것이 아니라면, 헌병반의 질서에 책임이 있는 부서장의 입장에서는 스스로 나서서 일정한 규칙을 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정문 초소의 전-정치상태는 결국에는 문제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불평등한 업무분담을 후임이 스스로 정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계급사회의 권위를 충분히 내재화하기 위해서는, 군대 본연의 권위 외에 추가적인 폭력의 사용이 필연적으로 요청되며, 그러한 폭력은 결국 ‘군대가 원래 그런 곳이지’의 맥락을 벗어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균열은 어떤 방식으로든 밖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균열이 배태되고, 배태된 균열을 해소하면서 결과적으로 선임, 후임, 부서장 모두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규칙에 대한 잠정적인 합의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대체로 이러한 합의는 구두로 이루어지며, 구두합의에 기반한 규칙은 (적어도 초소 내에서는) 여전히 법치(法治)보다 인치(人治)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일련의 정치과정을 통해 정당한 업무분담의 기준점이 조금 더 후임 쪽으로 옮겨가긴 하지만, 선임은 여전히 마음만 먹으면 기준점을 새롭게 설정할 수 있다. 성문화 된 선후임 간의 업무분담에 대한 규정이 없는 한, 정문 초소 안에서의 선임이 갖는 미시적인 권력 그 자체는 건재하기 마련이다.
독일에서 공부하다 온 후임 F는 유학파여서 그런지, 초반에 욕을 많이 먹었다. 그는 그의 방식대로 K-군대문화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과연 이곳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있기는 할까. 어느새 선임 근무로 들어가기 시작한 나도 새로 전입 온 F와 첫 근무를 서게 됐다. 나는 당시 동서독의 통일과정에 관한 책『브란덴부르크 비망록』을 읽던 참이었고, 독일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F에게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았다. 예컨대, 동서독의 경제적 수준 차가 컸는데, 통일 이후 각 지역의 경제적 수준 및 인식은 어떻게 다른지, 독일 사람들은 통일 경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에서부터, 독일에서 인종차별의 경험은 없는지, 다니던 학교는 동서독 중 어디에 있었는지, 유학 비용은 부담되지 않았는지 등등.
F는 꽤 기수 차이가 나는 선임인 내가 자신과의 첫 근무를 위하여 질문들을 준비해왔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F가 밝히기를, 당시 나의 행동에 고마움을 느꼈다고 한다. 나의 개인적인 호기심을 일종의 배려로 착각한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시의 선임 근무는 말하지 않으려면 하지 않을 수 있는 미시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침묵을 강요할 권력은, 새벽에 4시간 동안 후임을 밖에 세워놓고 자신은 초소 안에서 잠을 잤던 선임이 누렸던 권력과 비교하자면 하잘 것 없지만, 그 좁은 공간에서는 그게 전부이기도 하다. 이런 위계 관계 자체에 거부감을 느꼈던 나는, 가능하면 업무분담의 기준점을 중앙에 놓기 위해 노력했다. 가능하면 무거운 철문도 같이 열고, 바리케이드도 같이 치우고, 어색한 분위기도 먼저 해소하려고 했다. 물론 내가 잘나서 시작한 일은 아니다. 근기수의 선임들이 먼저 변화의 포문을 열었고, 나와 근기수의 후임들은 그 나름의 방식대로 변화의 흐름을 이어나갔다.
작은 권력도 쉽게 부패한다. 내가 군대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교훈이다. 나 역시 전역하는 날까지 익숙해질 수 없었던 것은 교대근무였을 뿐, 공기처럼 만연한 권력관계에 점차 익숙해지지 않았다고, 결백을 주장할 수는 없다. 권력은 실온에 두면 금방 상해버리는 음식 같은 것이어서, 차가운 이성을 통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스스로 분투하지 않는 한, 이성의 냉장고가 내는 간헐적인 작동음을 견뎌내기는 쉽지 않다. 때로는 그냥 코드를 뽑아버리고, 그 안의 음식이 썩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될 때도 있기 마련이다. 이것이 인치보다 법치가, 자유보다 법이 나은 가장 결정적인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