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대에 배치받은 이후 가장 오래 볼 두 사람은 단연 맞선임과 맞후임이다. 소속이 결정되면서부터는 입대 기수를 권위의 원천으로 하여, '맞선임-자신-맞후임'이라는 작은 위계 관계가 성립한다. '기수'는 어지간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불변하는 고정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신(神)·자연·이치(理)·국민 등 전통적인 권위의 원천들과는 달리 그것을 전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신의 계시를 받든, 신묘한 하늘의 뜻을 읽든, 성인군자가 되든, 국민의 대표를 자처하든 간에 입대 선착순으로 정해진 이 위계는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전복되지 않는다. 즉, 우연한 계기로 한 번 정해진 맞선임과 맞후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맞선임과 맞후임을 만나는 것은 군생활의 홍복이요, 남은 복무기간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원동력이 된다.
나의 맞선임 D는 대략 일곱 기수마다 돌아오는 계원 TO에 해당했다. 헌병반에서 계원의 역할은 다른 일반 부서원들과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하나는 헌병반의 행정업무 및 군견장 관리 도맡아 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5분 대기조 임무에 고정된다는 점이다. 헌병반의 업무는 정문 초소 근무와 5분 대기조 근무로 나뉘는데, 보통은 두 근무를 순환해서 들어간다. 업무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근무 강도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정문 초소 근무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은 사람에 따라 장점으로 여겨지곤 했다.
한 달 먼저 입대한 D는 계원 TO이기도 했고, 마침 계원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헌병 반장님은 서울에서 온 대학생인 나에게 계원 의사를 재차 물었다. 난감했다. 나도 욕심이 전혀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보다 한 살 어린 D는, 며칠 겪어보지 않더라도 착한 사람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D는 (아마도) 진심으로 나에게 '하고 싶으면 편하게 말하라'고 했다. 결국 나는 계원직을 사양했고, D가 계원이 됐다.
누군가 나에게 '남은 긴 군생활을 생각해서 D에게 계원을 양보했냐'고 물어본다면, 대답은 '전혀 아니다'이다. 나는 내 나름대로 (당시에는 업무의 성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나의 이익을 위한 합리적인 선택을 내렸고, 그 선택에 대하여 전역날까지 후회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내게 계원 자리를 양보할 것 같았던 D는, 내가 계원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자 정말 좋아했다. 이렇게 자신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라니, 나만 괜히 서울 깍쟁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나도 서울 사람은 아닌데.
D는 정말 성실하게 계원 업무를 수행했다. 헌병반에서 D를 좋아하지 않거나,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시 일곱 기수 뒤인 그 다음 후임 계원도 정말 성실했는데, 게으름 피우기를 좋아하는 내게 잘 맞지 않는 일임이 분명했다. 착하고 성실한 동생 D는 (부대장의 표현에 따르면) '불행'한 내 군생활의 첫 번째 행운이었다. 그래서 나는 군견장 업무를 자주 거들었다. 내가 개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는 행운에 대한 감사함 때문이었다. 냄새도, 귀여움도 장난이 아닌 셰퍼드 두 마리가 있었는데 아직도 가끔 생각난다.
한 달 뒤에 입대한 맞후임 E는 정말 놀랍게도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같은 대학 같은 학과 동기였다. 70여 명 정도 되는 학과여서 서로 잘 모르는 사이이긴 했지만, 이름과 얼굴 정도는 아는 사이였다. E는 막막한 이 공간에서 내 숨통을 틔여줄 산소 호스처럼 보였다. 여기서 누군가와 '대화'할 수 있다면, E가 반드시 포함될 것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에게는 그의 방식대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겠지만, 어쩌다 나와 비슷한 '불행'을 공유하게 된 E는 존재 자체만으로 많은 위로가 됐다.
그러나, 뒤늦게 고백하건대 나는 E의 존재로부터 양가적인 감정을 느꼈다. 한 편으로 그는 나와 같은 '말'을 공유하는 친구였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내가 맞닥뜨린 현실을 부정할 수 없게끔 하는 닻이기도 했다. 닻의 무게는 내가 먼 바다까지 항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부대 밖의 세상, 내가 속해 있던 집단과의 연결고리였다. 현실과 이상 간의 괴리 속에서 한없이 옹졸해졌던 나의 모습을, 나와 같은 '말'을 통해 관찰하고 기억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나를 더 작아지게 하곤 했다.
E와 나는 종종 부당한 병영 문화에 대해 이야기했고, 밑으로라도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E는 특히 글을 아주 잘 썼다. 그는 내 주변에 모습을 드러낸 첫 번째 '소설가'였다. 소설을 쓴다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한없이 입체적인 현실을 개연적으로 재현하는, 그것도 재미있게 재현하는 일은 세계와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는가. 가까운 기수끼리는 같이 근무에 들어갈 일이 거의 없었지만, 가끔 같은 근무에 들어갈 때면, 우리는 밀란 쿤데라, 알베르 카뮈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문화'라고 부를만한 것은 TV 밖에 없던 삭막한 공간에서 저녁 메뉴가 아닌 다른 것에 대해 이야기나눌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나는 그런 행운에 취해 대학 동기에게 존댓말을 들을 다시 없을 기회를 너무 빨리 포기해버렸다.
돌이켜보면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의 맞선임 D와 맞후임 E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내가 군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끔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이다. 기수는 전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권위의 원천이지만, 비자발적인 고생을 함께하는 사이에서 피어나는 전우애는 결국 기수가 만든 위계를 잠식해버린다. 내가 맞선임의 선임이 되거나, 맞후임이 내 선임이 될 수는 없어도, '맞선임-나-맞후임'의 질서는 기수개념을 넘어 평등한 친우 관계가 될 수 있다. 원치 않아도 공·사의 경계가 희미할 수밖에 없는 부대 안에서 공적인 선후임 관계, 동시에 사적인 친우 관계 둘 다 무탈했으니, 이는 이중의 행운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