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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리 Jun 12. 2021

8. 내 인생의 가장 옹졸했던 경험

헌병은 서서 생각한다

느닷없이 머릿속의 관념들이 연결될 때가 있다. 나는 용돈을 벌기 위해 대치동의 유명 학원에서 논술 첨삭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이 일의 가장 큰 장점은 물론 짱짱한 시급이지만, 평소 잘 읽지 않는 시詩를 읽게 된다는 점 또한 마음에 들었다. 대학에서는 주로 정규 교육과정 내의 시를 출제하기 때문에 첨삭을 준비하다 보면 낯익은 시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학창 시절 시를 배우는 방식에 대해 비판적으로 회고하지만, 나는 그런 표준적인 접근법이 싫지 않았다. 언어적인 능력이 뛰어나고, 감정이 풍부해서 배우지 않고도 자기만의 방식대로 훌륭하게 시를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제목을 읽고, 시적 화자를 찾고, 상황과 정서를 중심으로 추론하는 표준적인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이 짧은 문장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시는 퀴즈였다. 퀴즈가 된 시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분석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덕에 많은 시를 눈에 익혔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더 이상 퀴즈를 풀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시 역시 읽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 남의 입시를 위해 다시 시를 읽게 되다니, 퀴즈가 된 시에 어울리는 재회였다. 출제된 시는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였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하는 이 시는 다행히도 학생 때 눈에 익혔던 많은 시 중 하나였다. 이는 포로수용소에서 겪은 굴종의 경험을 토대로 옹졸함을 반성하는 시적 화자의 성찰적 태도가 인상적인 시다. 출제된 문제는 무엇이 시적 화자를 옹졸하게 만들었는지를 묻고 있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이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에게 욕을 하고/옹졸하게 욕을 하고/ (중략)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절정(絶頂)위에는 서 있지/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이발쟁이에게/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정말 얼마큼 작으냐...


퀴즈가 된 시는 고등학생의 문해력과 사고력을 측정하는 수단으로서 놓여있었고, 첨삭을 준비하기 위해 김수영 시인의 시를 읽은 나는 잠시 학생들의 답안지를 접어두고 나의 오랜 일기장을 꺼내어 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첨삭 준비를 멈추고, 분명 화가 나는데 어디에다 화내야 할지 몰랐던 때를 떠올렸다. 방향을 잃은 나의 말은 공허했고 행동은 구차했다. 뻔한 자기 합리화도 완성하지 못한 나는 점점 작아져만 갔다. 그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고 내 감정은 설명되지 않은 채로 기록만이 남았다. 시적 화자인 옹졸한 '나'는 내 설명되지 않은 감정을 불러냈고, 설명했다. 그렇게 나는 이것이 퀴즈가 된 ‘시’ 임을 알았다.




당시의 설명되지 않은 분노는 먼저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자주 앓아누웠다. 고열을 동반한 몸살감기와, 구내염과 편도염, 편두통이 반복됐다. 늘 피로했고, 무기력했다. 그다음에는 다리를 떨었다. 밤이 되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다리를 움직이고 싶어졌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처음 겪는 이상한 증상에 불안해진 나는 서울의 한 대학병원을 찾았고, ‘하지불안증후군’이라는 신경증 진단을 받았다. 당장의 증상을 멎게 해주는 약을 처방받았다. 몸이 망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내가 처음 분노한 대상은 ‘군기’라는 관념이었다. 나는 헌병반 사무실 전화가 울릴 때 도저히 내가 먼저 달려가 받을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늉을 해야 한다는 사실과, 야간 근무를 위해 선임을 깨울 때는 몸에 손을 대서는 안 되고 오직 귓속말을 전해야 한다는 관습과, 압존법에 민감한 내 또래 선임들의 모습과, 자신들은 지키지 않는 규범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선임들의 모습을 보면서 분노했다. 군기는 그 나름대로 문제적이었던 것이 분명했지만, 그때도 나는 내가 어느 정도 비켜서 있음을 알았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무엇이 나를 옹졸하게 만들었는가. 내가 겪었던 일련의 증상들은 사실 교대근무로부터 비롯하는 것들이었다. 문제는 공군의 업무 분담 체계이다. 어느 군대나 불침번이 필요하고, 그 일의 존재 자체에 대해 문제 삼을 수는 없다. 다만, 육군과 달리 공군은 동일한 인원이 2년 동안 불침번 업무를 전담한다는 게 문제다. 병원, 경찰서, 소방, 공장 등 사회의 각종 시설에서 교대근무를 담당하는 인원들이 겪는 건강상의 문제에 관한 연구는 충분히 많다. 이 과도한 업무의 집중, 그리고 그 업무를 분배하고 보상하는 방식에 대하여 비켜서지 않고, 절정에 서서 비판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 시스템의 맨 아래에서 시스템을 향해 짖어대기란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래야 나는 얼만큼 작으냐. 나는 실은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대상을 향해 분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좀 긍정적으로 생각해봐” 따위의 말들로 내 모든 작은 고통이 부정당할까 두려워 나는 섣불리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병영생활 상담관이나, 정신건강증진센터로 연락하면 상황이 개선될까?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으나 서투른 대처로 결국 부대에서 가십거리로 전락하지는 않을까. 혹은 ‘객관적인’ 상황을 ‘조사’ 한 결과, 내 고통을 어리광으로 치부하지는 않을까. ‘전속’을 요청하면 사고유발 위험이 높은 병사로 낙인찍히지는 않을까. 나 혼자 구원받으면, 나는 결국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나는 이런 고민들로 ‘자야 할 시간에 잠들지 못하는 이 생활을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수십 번 썼다 지웠다.      



내가 처음 이 부대에 헌병 특기로 배속받았을 때, 당시 부대의 가장 높은 사람은 개인 면담 시간에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게 네 인생의 첫 번째 ‘불행’이라고 생각해라.” 부대장에게 나는 누군가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쯤으로 보였을까. 좋은 대학을 다니던 젊은 청년이 이 작은 부대의 헌병으로 배치된 사실을 그는 그렇게 이해했던 것 같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우연한 불행에 나는 얼마나 빨리 익숙해져야 했던 것일까. 익숙해진다는 것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그 안에서 ‘괜찮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특히 그것이 부정적인 변화일 때 익숙해진다는 의미는 '체념'과 동의어가 된다. 가령 자신이 새롭게 처한 환경의 현실이 이상과 너무 극심한 간극을 가지고 있고,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할 여지가 없을 때, 우리는 고통 끝에 그저 만족하는 법을 알게 된다. 다만 필요한 것은 이 새로운 환경이 어떠한 현실적인 노력에 의해서도 변하기 어렵고, 변화의 시도가 가져오는 위험을 감수할 만한 확신을 갖기 어려울 때, 그 사실을 일찍 깨닫는 것만이 스스로가 겪는 고통의 시간을 단축시켜줄 수 있다는 체념적인 깨달음이다.


체념적인 깨달음 뒤에도 사실은 더 중요한 문제가 남는다. 문제는 개인이 처한 부정적인 상황이 얼마나 객관적으로 부조리하고 비인간적이냐 하는 것이다.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춘 개인은 외부에서 누군가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것을 알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런 보편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보증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착취의 구조 속에서 고통받는 영혼들 특유의 긍정적이고 성실한 자세 이면에 숨겨진 철저한 자기기만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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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을 잊은 몸, 서서히 부서지는 몸 (한겨레)

* 교대근무와 건강 - 교대근무의 유형과 근로환경 요인을 중심으로

김종우 (2016). 교대근무와 건강. 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 418-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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