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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냉수 Oct 14. 2020

40년째 계속되는 그녀의 식단 일기

동경에서 만난 인연Ⅱ

   결혼과 동시 일본에 둥지를 튼 그 해 하타 씨를 처음 만났습니다. 자원봉사로 일본어를 가르치던 그녀는 곱고 이지적인 분위기였습니다. 성실한 그녀는 보수 없는 일이라 하여 준비를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비가 오거나, 피곤한 날이면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수업 준비로 고생했을 하타 씨를 생각하면서 힘을 냈습니다.   (도쿄에는 도쿄도와 민간단체에서 운영하는 일본어 교실이 많이 있습니다. 정식 일본어 선생님이 아닌 자원 봉사자들이기 때문에 때때로 질문에 답이 막힐 때도 있지만 무료에 가까운 수업료는 물론 입소문 난 병원, 저렴하고 물건 좋은 슈퍼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보만큼은 자세하게 얻을 수 있습니다. 각 교실별로 열리는 요일이 다르기 때문에 바지런함만 있다면 장소를 바꿔가며 매일 일본어 공부를 할 수도 있습니다) 


   “따님과 놀러 오지 않으실래요.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어서 불편하실 수도 있지만 괜찮으시다면 차라도 한 잔 하세요.” 열정적이고 개방적인 한국과 폐쇄적이며 신중한 일본의 차이일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친해지고 싶어 친구를 초대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집에 사람을 초대하는 일이 흔치 않으며, 초대한다면 정말 친해지고 난 후가 됩니다.

   잠깐 다른 이야기지만 제가 아는 사토 씨와 에미코 씨는 50년 지기 동네 친구입니다. 고등학교 동창으로 꽤나 가까운 사이지만 서로의 집에 가 본 적이 없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딸과 함께 전철에 올랐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타상에게 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하타 씨의 시어머니께 인사를 했습니다. 정갈한 백발의 할머님은 딸아이가 똘똘해 보인 다시며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차 마시러 오라던 하타 씨의 집에서는 이른 점심 준비가 한창이었습니다. 벚꽃을 넣어 윤기 나게 지은 밥에 귀한 손님이 올 때 내놓는다는 도미찜, 계란을 부드럽게 찐 자왕무시…. ‘입’으로 먹는 게 아니라 ‘눈’으로 먹는다는 일본 음식의 화려한 색감에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와! 정말 맛있어 보여요. 이렇게까지 준비해 주시고 감사합니다. 만드시느라 많이 힘드셨지요?”

   “아니에요. 언젠가 일본 음식을 함께 먹고 싶었어요.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세요.”


   젓가락질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행복한 고민으로 망설였습니다.

주부의 상차림과 손맛은 하루 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초보 주부가 보기에도 음식에서 하타 씨의 묵직한 내공이 전해졌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음식 이야기로 흘렀습니다. 재료 본연의 맛을 살려내는 일본 음식의 특징에서부터 이 맘 때 만들면 맛있는 제철 음식의 조리 방법도 들었습니다. 메인 요리부터 디저트까지 영양적 밸런스는 물론 색감까지 세심하게 정성 들여 차려내는 그녀의 요리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아니에요, 저도 10년째 요리 교실에 다니는 걸요. 요리에도 유행이 있고 늘 새로운 조리법을 배우고 싶어서요” 이 정도 퀄리티의 요리를 만들어내는 분이 요리 교실이라니… 내가 놀라워하자 하타 씨는 웃으며 장식장 한편에 있는 노트와 파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은 신혼 때부터 써내려 오고 있는 그녀의 식단 일기였습니다. 식단 일기에는 오늘 먹은 음식에 대한 평가, 식구들의 반응, 가족들이 제일 맛있게 먹은 음식 그리고 내일의 메뉴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노트와 세트로 놓여 있는 파일에는 식구들이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의 레시피가 꽂혀 있었습니다.

   “식단 노트를 40년 동안 쓰고 계신다고요? 가족들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아니에요. 서투르니까 이러는 거예요. 정말 잘하는 분들은 굳이 써놓지 않아도 술술 나오겠지요. ”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고 소중한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렇게 엄마가 되었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맛난 요리와 따스한 대화가 오가는 저녁, 정갈한 침대 위에서 편안히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행복을 느낍니다. 엄마인 내가 하는 일이 시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때때로 마음의 여유를 놓칠 때면 세월은 가고 있는데 성장하지 않고 정체돼 있는 것 같은 마음에 조바심이 나기도 했습니다.

   가족에게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바지런함과 겸손을 보면서 숙연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같은 주부라도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로 임하냐에 따라 그 어떤 전문직 못지 않은 주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도 엿보았습니다.

    "우리 가늘고 길게 인연을 이어 나가요”

하타 씨가 이 말을 처음 했을 때, 정확히 어떤 뜻인지 알지 못해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에서는 주로 ‘굵고 짧게’로 비유하는 경우가 많고, 제게 있어 ‘가늘고 길게’는 부정적인 이미지(벽에 X칠...^^)라서요.


   헌데 인생을 살아 보니 '가늘고 길게'는 참 편안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어 줍니다. 그 날을 시작으로 하타 씨는 매년 4월이면 잘 차려진 일본 음식과 함께 저를 집으로 초대했고, 12월이 되면 우리 집에 와서 김장 김치를 함께 먹었습니다. 한 계절에 한 번씩 만나 커피를 마시고 일상을 얘기하는 그리 뜨거울 것 없는 관계지만 그녀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천천히 친구가 됐습니다.

   “하타라고 해요. 일본 생활이 힘들지 않나요? 도울 수 있는 건 최대한 돕고 싶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18년 전 그녀는 낯선 외국 생활을 시작한 새댁이 안쓰러웠는지 따스하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녀의 말처럼 이 가을에도 우리의 인연은  ‘가늘고 길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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