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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냉수 Sep 22. 2021

비빌 언덕

그때 나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갑자기 어지러워 거실에 있는 둘째를 보니 아이가 앉은 채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2~3초 뒤 곧바로 이어지는 긴급 재난 속보‘쿵!’ 몸이 밑으로 훅 꺼지면서 건물이 돌기 시작했다.(지진 대책의 일환) 외마디 비명과 함께 달려가 아이를 꼭 안고 베란다로 나가 상황을 살폈다. 


놀랍게도 비상계단은 신속하게 피난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지진이 멈추고 불과 10초~20초 정도 찰나의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늘 지진 대비 가방을 준비해 현관 근처에 놓는다는 이들의 이야기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그날 일본을 강타한 3.11 대지진은 일본 근대 지진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의 지진이었다고 한다.

 

서둘러 여권건강 보험증통장과 현금아이가 먹을 비상 식품을 챙겨 집 밖으로 달음박질쳤다. 유치원 때부터 재난 대비 훈련을 해 온 일본인들은 너무나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패닉으로 우왕좌왕할 만도, 걔 중에는 멘털이 약해서 기함을 칠 법도 한데 누구 하나 불안을 드러내는 일  없이 조용하고 신속하게 대피 장소로 향했다


TV, 영화에서만 보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공원의 지면이 여진과 함께 시도 때도 없이 들썩거리며 가뜩이나 불안한 마음에 불을 질렀다. 공원 맞은편 타워 맨션은 여진으로 인해 둔탁하게 돌며 기분 나쁜 소리를 계속 내고 있었고 길가의 전선이 미친년 널 뛰듯 자발 맞게 출렁댔다.  

'꿈이 아닐까?'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통신과 교통이 모두 두절된 와중에 그래도 하늘이 도운 두 가지 일이 있었는데 하나는 전철 통학하는 초등생 딸이 그 시간에 어디에 있는지 예상 가능했다는 점, 두 번째는 모든 교통 기관이 스톱된 가운데 차고로 향하는 택시를 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택시 안에서 본 거리는 폭탄 터진 전쟁통을 연상케 했다거리를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들이 어딘가를 향해 분주히 걷고 있었고 여진으로 도로는 끊임없이 들썩거렸다. 어렵사리 만난 첫째 딸과 자고 있는 둘째를 안고 근처 초등학교에 마련된 피난소에 몸을 뉘었다. 


"아빠! 어떻게 왔어? 전철 이제 움직여?" 

오후 늦게 복구된 통신으로 남편과 통화가 됐고, 7시간을 걸어서 온 남편과 대피소에서 새벽 2시쯤에 만날 수 있었다. 3월이라고는 하지만 칼바람이 살풀이해대는 매섭고도 두려운 밤이었다. 전대미문의 대혼란 속 수많은 일본인 무리에 섞여 있는 외국인 가족. 




관동 대지진은 1923년 일어난 지진으로, 이로 인해 사회 혼란과 국민 불만이 심해지자 국민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 일본 정부가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탔다',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퍼트려 수많은 한국인들이 살해된 사건이다.


그저 가슴 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로 생각하던 그 일이 자꾸 떠올랐다. 처음이야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겠지만, 사태가 점점 심각해져 사람들이 패닉에 빠지고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이 피난소에서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다음 날 교통이 재개됐고, 하루하루 복잡한 심경으로 대지진 이후의 시기를 보냈다. 매일 떠다니는 헬리콥터 소리를 들으면 자동으로 가슴이 요동쳐 진정할 수 없었고 '지금 보고 있는 파란 하늘과 나무를 언제까지 볼 수 있을까' 하는 암연이 생활 깊숙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당시 한국으로 돌아간 가족도 많았고 나 역시 한국행을 결심했었다.


사이좋게 지내는 일본의 친구들은 가슴 아팠지만, 돌아갈 나라와 가족이 있다는 사실은 그 시기를 살아낼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코로나에 걸린 교민들은 구호물품을 신청해 달라'는 재일 한국인 연합회의 공고를 봤을 때 고마워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구호물품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가족의 안위를 걱정해 주고 지원해 주려하는 비빌 언덕이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의 코로나 대처와 방역에 큰 실망과 함께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자기 나라 국민도 저런 형국인데 외국인은 더 말해 무엇하나' 현실을 씁쓸히 인정하고 있었다.


신청 며칠 뒤 구호 물품이 도착했다.

재일 한국인 협회에서 발송한 구호물품

곤란을 겪고 있을 한국인에게 도움이 되고자 노력한 세심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스크, 고추장, 육개장, 믹스 커피, 비타민, 소독제... 상자 속을 가만히 바라봤다. 엄마가 보내준 EMS를 받은 느낌이었다.


'끈 떨어진 갓'처럼 알게 모르게 외국인이라는 소외감을 지니고 살아왔는데 이럴 때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안위를 걱정해 주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됐다.


이런 택배 상자 하나를 꾸리려면 얼마나 많은 정성과 수고가 드는지 알고 있다. 한국인이라는 끈으로 연결된 따스함을 느낄 수 있어서 그간의 마음고생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달콤한 쿠키를 보냈다. 

 

"이렇게 하나하나 포장도 힘드셨을 텐데 여러모로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도 나라도 있으나 함께 하지는 못하는 외국인... 혈혈단신 외국인이 아님을 느끼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따스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보내 주신 물건들은 구호 물품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사랑'이라 생각하며 잘 먹겠습니다. 힘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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