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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냉수 Oct 06. 2021

"저 새끼 죽이고, 나도 죽을 거예요"

"저 새끼 죽이고 나도 죽을 거예요!"

잘못 들은  아닐까 했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거칠게 구는 S 분노를 토해내며 뜯어말리는  손을 사납게 뿌리쳤다. 국민학교 아이들이 예닐곱 있었다. S 씩씩대며 노려보고 있는 아이는 착하고 귀여1학년 L이었다.


어른인 나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었는지 S는 갑자기 책상 주위를 휘 둘러보더니 연필 깎는 칼을 손에 쥐었다.

"오늘 저 새끼 죽인다니까아아!"

내 비명 소리에 건너방에서 중학생들을 지도하던 남자 선생님이 달려왔고  충격을 안긴 S 난동은 그렇게 종결됐다. 교과서더미에서 벗어나  대학생이  해였다.


다양한 세상살이의 모습을 알지 못하던 그런 나이였다. 부모가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방치된 아이들을 함께 돌보지 않겠냐는 고등학교  친구의 말에 학교가 끝나면 공단으로 향했다.


그곳은 평생을 노동 운동에  바친 개척 교회 목사님이 노동자의 자녀들을 위해 만든 공부방이었다.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은 개구쟁이들, 사춘기 청소년들과 함께 숙제도 하고 캠프도 가고 음악회도 열면서 그렇게 아이들의  언니  오빠가 되어갔다.


아이들은  엉뚱하고도 사랑스럽고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엄마가  먹고 계속 자서 저녁도 아침도  먹었다는 이야기,    도망간 엄마의 얼굴이 이제는 생각나지 않는다는 이야기, 엄마와 아빠가  먹고 매일 싸우는데 자기가 숨는 비밀 기지가 있다는 이야기...

똘망똘망한 눈의 아이들은 그렇게 필터로 걸러내지 않은 이야기들을 조잘댔나는 기쁜 노래를, 행복한 동화를, 신나는 게임을 아이들 앞에 내놓았다.


헌데 S는 여느 아이들이랑 달랐다. 학교에서 돌아와 봤자 갈 곳도 없는 데다가 공부방에서는 간식도 주니 오기는 오는데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늘 혼자였다. 저학년 아이들은 특히나 S를 무서워했다. 무엇보다 S는 아이의 눈빛을 하고 있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야기도 걸고 함께 어울리려 노력했으나 커터칼 사건 이후 교사회의에서는 그날그날 S를 담당하는 남자 선생님을 정해놓았다. 칼을 휘두르는 국민학생이라니... 어리지만 그 눈빛이 무서웠다. 엮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의 친구가 되어보자 마음먹게 된 것은 가정 방문 때문이었다.

일 년에 한 번 선생님들은 각자의 담당 구역을 정하고 가정방문을 한다. 초짜인 나는 전도사님과 함께 방문을 다녔는데 뜻밖에도 S가 문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부방에서와는 달리 부끄러운지 잠깐 웃기도 하면서 집안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문을 여는 순간 훅 끼쳐오는 악취.

전도사님은 집에서 술만 먹고 일하지 않는 S 아버지에게 일자리를 비롯한 좋은 정보들을 건넸지만, 귀찮은 표정 빨리 가줬으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살짝살짝 여기저기 둘러봤다.


좁은   칸에서  명의 가족이 생활하고 있었다. 주방에는 설거지가 가득 쌓여 있었고   없는 살림 위에는 두터운 먼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때에 절어 맨질맨질하기까지  요와 이불은 방의 반을 차지한  널브러져 있었고  이불 위에 S 아버지가 삐뚜름하게 앉아 못마땅한 표정으로 전도사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텔레비전 위에는 비디오가 있었는데 벌거벗은 남녀가 적나라하게 인쇄된 비디오테이프들이 여기저기 뒹굴러 다니고 있었다.  난 왠지 S의 그 눈빛을 이해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S가 L을 죽어라 미워하는 이유도 그날 알았다.


그날 방문한 여덟  중에서 L 할머니는 유일하게 우리를 반겨주신 분이다. L에게는 부모님이  계셨지만 L 끔찍이 사랑하는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의 사랑으로 크는 L에게는 그만큼의 사랑스러움이 있었고 S 본능적으로 그걸 알았던  같다.  후로 나는 S에게 다가갔다. 배고프니  간식을 내놓으라며 장난을 걸었고 내 국민학  이야기를  주었다. 철옹성처럼 단단했던 아이는 생각보다 빨리 마음을 열어 주었다. 아마도 이렇게 꾸준히 관심을 보여준 이가 없어서였지 않을까.


"엘리베이터를 타보고 싶어요.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잖아요"

내가 꿈이 뭐냐고 물으니 소원으로 착각했는지 아니면 정말 꿈이 그거였는지 S는 이렇게 말했다.

그 주 토요일, S와 여섯 명의 아이들을 우리 집에 초대했다. 우리 집은 15층이었고 경비 아저씨의 눈을 피해 가며 스무 번 넘게 엘리베이터를 탔다. 집에서 함께 김밥과 치킨을 먹었고 권투를 하며 놀았다. 그날 우리는 많이 웃고 많이 행복했다. S는 이후 서서히 공부방 친구들과도 어울리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7년을 아이들과 함께 했다. 졸업 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도 간식거리를 사서 방문하곤 했고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교사회의에는 가급적 참석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과 함께 공부방도 변해갔다.


해가 거듭될수록 자원봉사자들의 발걸음이 뜸해지는 한편 공단 지역에는 점차 외국인 노동자들이 늘어났고 공부방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을 지켜주기 위한 기관으로 거듭났다.

발길이 뜸하던 S 중학교 1학년이 됐을   공단을 벗어나 나라에서 분양받은  아파트로 이사 갔다. 나는 전도사님과  집에 들러 아이가 새로이 함께   환경을 확인했다. 사춘기를 맞은 S 오랜만에 만나는 내가 낯선   머쓱해하다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젊음의  복판에 S 있다. 커터칼을 들고 분노에 떨고 있는 S, 엘리베이터 안에서 쿵쿵 신나게 뛰고 있는 S, 처음 해본다는 캠프파이어에서 연신 웃어대는 S.

나처럼 그에게도… 이 모든 그때의 추억들이   드는 밤에 떠오르는 따뜻한 추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무더웠던 여름의 캠프파이어에서처럼 환한 불빛이 계속해서 그를 밝게 비추었으면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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