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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이 올만큼 내가 힘들었나?

찰떡 직업을 찾는 모험 ep.36

by 일라

약 일주일 간의 발리로 떠난 가족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 정도는 쉬고 그다음 날부터 할 일을 하려고 했는데, 도무지 기운이 나질 않았다.

아직 여독이 안 풀려서 그런가 싶어서 틈틈이 조금씩 더 쉬면서 일을 해봤는데, 거의 일주일이 지나가는데도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

그러고는 예상치 못하게 번아웃이 왔다.


번아웃의 단계가 5단계 정도 있다면 2단계에서 3단계 사이의 번아웃이 찾아왔던 것 같다.

매주 열심히 그림을 그려도 기대만큼 반응도 없고, 브런치 글은 더더욱 반응이 없는 것 같고, 하고 있는 상담은 잘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감히 잡히질 않았다.

뭘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마음에 드는 결과가 안 보이니 의욕이 한풀 꺾인 것 같았다.

‘내가 이걸 계속한다고 뭐가 달라질까?’라는 생각이 나의 기운을 더욱 갉아먹었다.


디지털 튜터 알바가 끝난 뒤라 정기적인 수입이 사라져 더 불안해졌던 것 같기도 하다.

돈이 얼마 되지 않는 이 일들을 하는 게 나에게 큰 의미가 있는지 고민이 되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다른 걸 시작한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고, 또 그만큼 더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내 감정에 상관없이 그림은 매주 한 개씩은 올리자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인스타툰은 꾸역꾸역 그려서 올렸고, 브런치는 쓰고 싶은 글이 생각나지 않아 잠시 멈췄다.


사실 처음에는 번아웃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번아웃이 올 정도로 많은 일을 한 것 같지 않아서 겨우 이 정도로 지쳤다는 게 민망했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도망간 기력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무언가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에 일러스트 작가 멍디님이 하시는 마케팅 수업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강의를 신청했다.

멍디님의 말로는 요즘에는 이미 귀여운 캐릭터들이 많이 나와있기 때문에 캐릭터의 외모로 승부보기보단 마케팅을 잘해야 인기가 많아질 수 있다고 하셨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림만 열심히 그리고 마케팅에는 크게 에너지를 쏟지 않았는데, 그래서 내 그림을 더 널리 알리지 못했던 것 같다.

예전에 인스타툰을 시작할 때도 들었던 말이었는데 지금 와서 다시 들어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마케팅은 필수 요건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마케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마케팅 플랜이 자연스럽게 하나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아니니 문제였다.

IT회사에서 서비스 기획자로 일할 때도 마케팅을 기획하는 게 어려웠었는데, 일러스트 작가가 된 지금도 여전히 마케팅은 어렵다.

‘일러스트페어 같은 곳에 나가봐야 하나? 그러려면 포트폴리오도 만들어야 하니 굿즈도 미리 만들어둔 게 있어야 하는데..‘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돌아다녔다.


해야 할 거는 많은데 정작 그것들을 할 당사자가 의욕도 없고 용기도 사라졌으니 일이 더디게 진행되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마케팅 수업을 듣고 나서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해 봤다.

일러스트페어는 지금 당장 나가고 싶다고 나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런 것보단 요즘 콘텐츠 트렌드가 뭔지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마침 그때 케이팝데몬헌터스가 약 2주 전부터 유행하고 있었는데, 사실 제목이 좀 유치한 것 같아서 안 보고 있다가 많은 동료 작가님들이 관련 콘텐츠를 올리시는 걸 보고 트렌드에 뒤처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니 웬걸, 영화가 너무 재밌는 게 아닌가! 도대체 왜 제목을 유치하게 지었는지 모를 정도로 노래들은 매우 세련됐고 캐릭터들의 각 특징들이 생생하게 잘 살아있었다.


이미 유행이 시작된 지 2주는 넘게 지난 상태라 지금 케데헌 콘텐츠를 올려도 될지 고민했지만, 고민할 시간에 한 장이라도 더 빨리 그려서 얼른 올려보자는 생각으로 후다닥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선 시간문제로 멍순이 버전의 헌트릭스 캐릭터들과 더피만 그려서 올렸는데 예상치 못하게 인스타그램보다 틱톡과 유튜브에서 반응이 더 좋았다.

한 분이 댓글에 사자보이즈 버전은 없냐는 말에 그날 당장 멍순이 버전 사자보이즈 캐릭터들도 그려서 며칠 후 바로 업로드했다.

사자보이즈도 지금까지의 콘텐츠들보다 조회수가 높게 나왔고, 프사로 해도 되냐는 분도 있었다.


유명 작가님들에 비하면 몇 개 되지 않은 댓글들이었지만 한두 명의 사람들이라도 내 그림을 좋아해 줬다는 게 나의 사그라든 의욕에 다시 불을 지폈다.

그 후로는 탄력을 받아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고, 얼마 전에는 멍순이의 오리지널 컨셉인 찰떡 직업을 찾는 모험에 대한 에피소드를 릴스로 만들었다.

찰떡 직업 모험 에피소드를 그리면서 한 가지 깨달았는데, 이번에도 열심히 그렸는데 반응이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조금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이 컨셉을 버리기는 싫으니, 최대한 요즘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콘텐츠들의 특징을 활용해서 내 콘텐츠에도 활용해 보기로 했다.

콘텐츠 자체를 베낀다기보다는 콘텐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나 길이 등 형식을 참고하고 있다.

이제 다시 그림 의욕이 제 자리를 찾았으니 몇 주간 미뤄졌던 일들을 다시 진행시켜보려고 한다.




찰떡 직업을 찾아 모험하는 아지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www.instagram.com/illam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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