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설공주 May 24. 2022

춥고 배고픈 시절의 힘

헝그리를 노래한다


춥고 배고픈 시절의 힘 - 헝그리를 노래한다

흑백 화면 속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듣노라면, 일찍 돌아가시거나 혹은 다른 사정으로 전설이 되신 분들이 행운아라는 생각을 한다.


원조 디바 마리아 칼라스 여사가 프랑스 방송국의 화면에서 '정결한 여신이여'의 공연이 있다.  단순한 드레스에 어깨에 두른 숄을 가슴에 안듯이 꼭 잡고 때로는 지긋이 눈을 감은채 끊어지듯 이어지던 노래가 끝나면, 객석에서는 우레 같은 함성이 터진다. 그의 목소리에는 수고하고 애썼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과 고독하고 아팠던 그의 인생이 묻어난다.


사이먼 앤 가펑클이 부르는 <침묵의 소리> 첫음절이 나올 때면 신음 비슷한 탄성이 터졌다. 그뿐이랴, '아이엠 쟈스트 어 푸어 보이... ' 로 시작하는 <복서>가 시작되면 너도 나도 탄성이 나온다. 감미로운 선율과는 달리 그 노랫말에 맘이 아픈 것은 나만이 아니리라. 불후의 명곡이란 이런 곡이 아닐까.


루치아노 파바로띠가 처음부터 체중이 160킬로는 아니었다. 시커먼 턱수염, 색칠한 꺼먼 눈썹, 왼손에 하얀 손수건도 없던 시절이 있었다. 1963년 러시아어(?)의 자막인 듯한 화면에서 성큼성큼 무대로 나오는 모습을 보면 딱 보기 좋다. 훗날 오페라 아이다에서 개선 곡을, 걸을 수가 없어서 앉아서 불렀다는 사연은 상상되지 않는다. 낯가림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부르는 축배의 노래를 듣노라면 유튜브라는 괴물(?)을 만든 이에게 경의를 보내곤 한다. 그 목소리에는 이제 막 경력을 시작한, 여전히 갈 길이 멀리 있음을 아는 사람이 갖는 긴장의 울림과 표정이 있다.


톰 존스 오빠가 <그린그린 그래스 오브 홈>을 부르면 마음이 정갈해지는 느낌조차 들곤 한다. 초창기 화면에서 보면 혹시 금지약물 복용? 싶을 정도의 눈빛도 있긴 하지만, 탁한 듯한 그의 목소리가 영롱한 미성으로 들릴 수 있음을, 그 노랫말에 얽힌 사연과 전설이 사실일 것이라고 믿게 한다.  


송창식 오빠가 부르는 <고래 사냥>을 듣노라면 그 가사에 맘이 흔들린다. '세상 모두가 돌아 앉았'다는 절규와 울부짖는 노랫말은 기댈 언덕도, 등을 누일 방 한 칸도 없었던 빈 주먹의 빈곤의 세대와 시대에 고래를 잡겠다는 무모함이 아름다울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카수 배호 씨가 부르는 노래를 듣노라면, 타고난 미성이 주는 아름다움과 위로란 이런 것이다 싶다. 저토록 듣기가 좋은, 듣는 이들을 괴롭히지 않는 노래를 부르려면 정작 가수는 많이 힘들었으리라는 고마운 마음이 인다. 연속된 화면이 아니다. 스냅사진 몇 장을 이어 붙인 그 모습과 목소리에는 기본적인 의식주 포함 절대 부족만이 차고 넘쳤던, 그 춥고 배고픈 시절을 위로하는 힘이 있다. 그의 사후 반세기도 더 지났지만 여전한 팬클럽과 팬덤은 그 다양함에 놀라지만 그 현상은 놀랍지 않다.


이 분들 뿐이랴,  '인류의 위대한 자산'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카수들의 노래도 흑백 화면 속에서 울려 퍼질 때와 데뷔 초창기 화면에서 특히 그렇다. 아직도 생존한 몇 분들과 요즘 뜨거나 뜬, 카수들에게 쏟아지는 화려한 조명과 잘 연출된 배경 속의 노래는 그만한 공명을 주지 않는다. 만들어진, 기획된 가수들의 스토리들은 그것들마저도 기획되어 만들어진 것 같고, 뭣보다도 그 재능들이 너무 빨리 낭비되어서 짠할 지경이다.


라디오로 시작해서 흑백 티브이와 칼라 시대까지 걸쳐 활동하신 분들을 보면 존경의 염이 없을 수 없다. 30년 40년 노래를 불렀지만 이제 진짜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기염을 토하는 분들을 이해할 듯도 하다. 그럼에도 괴롭다. 그분들의 최고적 성량이나 음량이 곤란한 탓만은 아니다. 그들이 충분히 성공한, 어쩌면 모든 것을 이루다시피 했음에 오는 배고픔이 사라진 곳에 잘잘 흐르는 기름기가 식상하다


그들이 부르는, 세상에 나온지도 반세기가 더 넘었을 법한 시간 동안 몇 번이나 불려졌을까? 노사연 씨의 만남이 빅히트를 했을 때 얘기이다. 하루에 평균 700번인가 70번인가를 부른다고. 그 노래들을 연습하고 준비하면서 처음 가졌던 열정과 설렘은 이름조차도 희미한 첫사랑의 그림자가 되었을텐데. 그 노래가 갖다 준 성공과 명예조차도 이제는 감당이 어려운 멍에 또는 속박이 되었을 시간이고 지겹다 못해 무서울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다 일찍 끝내고 마쳐야 된다는 뜻은 아니다. 롱런하신 분들이 주는 기쁨과 위로가 있다. 최백호 오빠 같은 경우가 특히 그런데 어째 이 양반 나이가 들수록 더 멋있다. 내 말은, 등은 따시고 배는 부른데, 여전히 마약 같은 무대와 청중을 쫓아다닌다면 그렇다는 거다. 한때 날렸던 쓰리 테너스처럼.




 



작가의 이전글 대통령의 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