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타국의 이야기로만 치부할 것인가.
한나 아렌트는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함’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아이히만이 특별히 악마적이거나 잔인한 인물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 관료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악은 극단적인 악의를 가진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이들이 별 고민 없이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악의 평범함의 본질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단순히 직무에 충실했던 평범한 사람으로 보았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으며,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악의 평범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현상은 요즘 기업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직원들이 윤리적 문제나 더 큰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주어진 업무만 수행할 때, 의도치 않게 악의 결과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함’은 평범한 사람이 타성에 젖어 무비판적으로 일을 할 때 드러난다. 그 일이 선한 결과를 낳든 악한 결과를 낳든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역할에만 집중하면, 악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악을 저질러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다. 어쩌면 이는 인간 본성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 판단하기 싫은 마음, 그리고 악의 결과로 비판받으면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변명하는 태도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런 변명이 악의 책임을 면제해 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출처: Lummi.aiⓒMariate
회사에서 만날 수 있는 ‘악의 평범함‘
악의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기업 내 부서가 직원들의 권리 보호보다 회사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면, 이는 직원의 권리를 침해하는 악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는 악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직무 수행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변명할 뿐이다. 또 다른 예는 부서 이기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회사나 부서 간 협업에서 요청 부서와 수용 부서가 나뉘고, 요청 부서는 적극적으로 요구를 밀어붙이며 수용 부서는 상황에 따라 이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한다. 이 과정에서 ‘악의 평범함’이 드러난다. 겉으로는 악으로 보이지 않을지라도, 업무 수행 중 책임을 회피하면 누군가는 그 결과의 피해를 입게 된다. 의도는 악하지 않을지라도 결과는 악할 수 있다.
또한 부조리도 하나의 예가 된다. 약간의 피해가 예상되더라도 감당할 만한 수준이라 여기며 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태도다. 이런 작은 묵인이 쌓이면 어느 순간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진다. 마치 뜨거운 냄비 속 개구리가 점점 뜨거워지는 물을 견디다 결국 위험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반대로, 불합리와 불평등을 없애려는 의지로 지나치게 문제를 제기하면, 또 다른 ‘악의 평범함’의 피해자를 만들 수도 있다.
‘악의 평범함’은 요즘 기업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업무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사회적 해악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행동과 결정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직장 내에서 ‘생각하는 힘’을 되살리는 것이 아렌트가 경고한 ‘악의 평범함’으로부터 우리 자신과 사회를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사회는 이익과 손해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누군가는 이득을 보고, 누군가는 피해를 입는다. 하지만 이득을 보는 사람이 늘 이득만 보거나 피해를 보는 사람이 늘 손해만 보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악이라고 여기지 않거나 의도하지 않은 행동에서 악이 생기지 않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자세다. 특히 윤리적 의식이 점점 희박해지는 듯 보이는 현대 사회에서, 스스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더욱 절실하지 않을까.
한 번쯤 생각해 보자.
나의 행동이 과연 남에게 악을 끼치지 않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