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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Apr 18. 2022

엄마, 원숭이 그리고 불쏘시개

내 책장 한 칸은 엄마 책 자리이다여든인 나의 엄마는 한글은 알지만 글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그래서 엄마의 책은 놀이책들이다미로 찾기다른 그림 찾기숫자 퀴즈색칠하기동물놀이스티커 놀이 등글씨가 커야 하고 그림이 있어야 한다

     

또 퀴즈가 너무 어려우면 엄마가 재미를 못 느낀다그 난이도란 것이 4~5세가 적당하다는 것은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내가 얻어낸 결과다아동도서는 나이별로 난이도 구별이 거의 표준화돼있는 듯싶은데노인의 지적 수준은 개인차이가 커서 나이별로 그룹화할 수 없지 않나

     

나의 엄마와 비슷한 난이도 정도를 내가 직접 찾아야 했다서점의 아동코너에서 한참을 서있는 이유가 그것이다엄마랑 같이 가서 책을 고를 때도 있는데 그때는 직원의 눈치가 자녀 또는 손녀 책을 사주러 왔나 보다 하는 것 같다뭐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 고객들과 늙은 엄마가 아동코너에서 함께 책을 고르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나이 들면 애가 된다는 말을 보란 듯이 확인하고 실천하는 현장이 바로 여기구나 싶다

     

엄마가 좋아하는 코코아를 주문해놓고 카페에서 함께 책 보는 것을 좋아한다처음에는 엄마는 엄마 책나는 내 책그렇게 각자 보다가 어느 순간 나는엄마와 이야기하는 추억을 더 만들어야겠다는 자각을 했다내가 책 한 장 더 읽는 게 뭐가 중요할까그때부터 우리는 엄마 책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엄마다음 문제 읽어봐봐

달리기대회맨 앞과 맨 뒤에서 뛰어오는 동물을 찾아 동그라미 하세요

엄마잘 읽었어그림에서 1등하고 꼴찌가 누군지 찾는거네

     

이 문제는 너무 쉬웠다쉽던 어렵던 모든 책이 정답만 맞추고 다음 페이지로 후딱 넘어가기엔 시간이 아까운 면이 있다응용하기에 따라 이야기와 놀이를 더 확장할 수가 있다물론 그건 나의 몫이다.

     

엄마정답 찾아서 동그라미를 하고 옆에다가 이름도 써주자

얘네 짐승들 이름 쓰라고알았어쓰지 뭐.”

엄마엄마잠깐만...... 원승희원숭이가 나야지금 원숭이한테 내 이름을 쓴거야?

틀렸니맞는데......”

내가 엄마때매 웃겨죽겠어~~하하하

     

오 마이 갓~! 원숭이한테 내 이름을 쓰다니......! 워낙에 책을 평생 멀리했다손 치더라도 어떻게 원숭이에다 딸 이름으로 합성어를 만들어버린단 말인가나의 폭소와 그냥 따라 웃는 엄마 웃음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카페 손님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보았다그날의 엄마 웃음소리를 내 대뇌피질의 장기기억으로 남기고 싶다.

     

층층시하 농사꾼 집에 시집오지 않았다면 어쩌면 이 여자는 아침드라마처럼 다정하게 <늑대를 잡으러 간 빨간 모자>를 읽어주며 아이를 재웠을지도 모를 일이다손에 쥔 것은 엄마처럼 꼬부라진 호미가 아니라 여성잡지나 백 선생 요리책일지도....

     

단계가 높아지면서 나는 엄마를 그림 퍼즐의 세계로 인도했다손가락 운동이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한다아빠가 마실 나가면 친구 없는 엄마로서는 혼자서 갖고 놀기에 퍼즐이 딱이다당연히 처음에는 평면 퍼즐부터 시작을 했었다

     

너는 엄마를 뭘로 보고......참나이걸 하라고?”

     

보자마자 엄마는 어이없어했다내가 꺼낸 그림은 빨간 사과 하나에 6피스였다내가 엄마를 너무 과소평가했구나. “엄마이건 내가 너무했네하하하바로 다음 날 100피스로 점프해서 공급하기 시작했다이제 엄마는 500피스도 뚝딱이다그럴수록 아빠의 잔소리는 늘어만 갔다.

     

내 그거 아궁이 불쏘시개로 언젠간 느버려야지당최 

아궁이에 왜 아빠?”

네 엄마 저거 마루에 늘어놓는 거 뵈기 싫어서... 

아빠그르지 말고 아빠도 엄마랑 같이 맞추고 그러셔

 

아빠는 엄마의 놀이가 영 못마땅하다입안 모래처럼 껄끄러운 아빠의 핀잔에도 엄마는 당당히 평면 퍼즐을 졸업했고 나는 입체 퍼즐로 승진을 시켜드렸다머리 쓰기도 좋고 시각적으로도 입체 퍼즐을 백 배는 더 흥미로워하셨다엄마는 이제 설렘으로 택배를 기다린다

     

엄마의 거실은 더 이상 올려놓을 데가 없을 정도로 자리란 자리는 다 퍼즐이 전시되어있다. <그리스도 부활 대성당>을 비롯한 각종 세계 건축물지구본자동차들동물로봇....... 더 이상 사 보낼 게 없다더구나 총 천연색 칼라 아동도서뿐만 아니라 이 퍼즐도 제법 가격이 만만치 않다.

     

놀러온 손주들이 만져서 퍼즐이 부서지면 엄마는 벌써 입이 나오고 못마땅한 표정을 못 감춘다달라고 하는 난감한 상황에서 엄마의 행동은 더 난감하다안방으로 옮겨 방문을 잠그는 게 아닌가몇 날 며칠을 끼우고 맞추고 다시 세워가며 완성한 엄마의 꽃 같은 표정을 봤다면...... 손주한테도 주기 싫은 게 맞다고 본다

     

가족을 위한 것 말고는 엄마가 온전히 자신의 것을 가져본 적이 있던가비록 종이 쪼가리일지라도 죽을힘을 다해 자신의 것을 지키는 엄마였으면 한다.  

     

아이고할머니가 되가꼬... 그래 저런 걸로 애한테 삐지고 참나그거 줘뻐리지내 저거 언젠가는 불쏘시개로 태와뿌러야지

     

아버지의 불쏘시게는 다행히 차고 넘쳐서 엄마의 작품은 아직 건재하다요즘은 엄마의 스마트폰에 게임 어플을 설치해드리고 있다

     

엄마 어서와화투말고 게임은 처음이지

     

엄마는 또 하나의 신세계에 빠져계신다덩달아 나는 또 조만간 화면이 큰 태블릿을 사야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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