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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Mar 20. 2022

어제까지 모든 게 마치 전생 같다

엄마아니야우리는 내려갈 거니까 아래 화살표를 눌러야 돼.”

우리를 태우러 올라와야지나는 그게 맞는 거 같은데

아니라니까엄마

     

복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했던 엄마와의 대화다엘리베이터 삼각형 방향을 두고 뭐가 맞는지 실랑이를 벌인다여든의 엄마는 여러 모습으로 나를 웃기게도 서글프게도 한다가장 난해할 때는 드라마를 보면서 사람 이름 우기기다차인표를 보고 차승원이라고 하고 손예진을 보고 송혜교라고 우긴다마트에서는 늘 가격표에서 0을 하나 떼어 읽고는 왜 이리 싸냐고 한다

     

엄마의 무지는 음... 의도는 없다단지 내가 못 받아들일 뿐못 받아들이겠는 행동은 식사 때도 나온다찌개를 뜬 숟가락이 입까지 오기도 전에 입을 벌써 벌리고 있는 엄마이건 나이 많은 어떤 할머니의 모습이지내 엄마의 모습은 아니어야 하는 나의 자가당착

     

엄마제발 나와서 먹을 때 식탁에 흘린 거는 좀 집어먹지 마

     

그러면 엄마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먹던 그릇을 식탁 끝 아래에다 받친다그리고 수저로 식탁에 흘린 면을 그릇에 다시 담는다엄마는 나 집어먹지 않았다“ 하는 표정이다내가 아주 환장을 한다언젠가는 이런 모습도 사무치게 그리울 날이 오겠지엄마는 지금 아이와 엄마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서있다.

     

한반도의 모든 여사님들처럼 엄마도 사진 찍을 때는 차렷 자세다. “엄마손가락 브이” 이제는 내가 카메라를 들기만 하면 엄마는 브이가 자동이다손가락 하트는 한 번에 따라 배웠지만 제주도 여행에서 우리가 뭐했는지 완전히 까먹고 기억 안 난다는 엄마어떻게 그게 생각이 안 날 수가 있는지 정말 이해가 안 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다.  

     

한 번은 공원에서 엄마가 자연스럽게 걷는 거를 내가 찍을 거라고 했다. “엄마하나 둘 셋내가 이걸 하는 게 아니었다엄마는 잘 걸어오다가 소리에 멈추었다손은 앞뒤로 하나씩 뻗고 다리 하나는 들고 다른 한 다리로 서있는 모양이었다그러니 쓰러질 듯 기우뚱기우뚱거릴 수밖에나는 완전 배를 움켜잡고 주저앉고 말았다엄마는 내가 왜 웃는지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엄마는 그냥 걸으면 내가 알아서 찍을 건데 고렇게 멈추니까 너무 웃기잖아.”

     

또 한 번은 산책하는 날이었다물론 나란히 걷고 있었다. “엄마뒤로 걷는 게 그렇게 운동에 좋다네같이 뒤로 걸어보자” 나는 설마 상상도 못 했다같이 걷던 엄마가 그대로 뒷걸음질 출이야나는 당연히 돌아서서 걷던 방향으로 뒤로 걸어갔으니까 우리는 마주보며 서로 멀어진 꼴이 되었다이런 코미디가 없다우린 또 같이 웃었다이게 왜 이렇게도 행복할까

     

아름다운 우리 아가씨~. 뭐해?”

사랑하는 우리 고정미씨나 친구들 만나고 있지롱.”

     

통화할 때 우리는 서로의 애칭으로 시작한다누군가 들으면 우리가 좀 모자라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내 지인들은 엄마가 어쩌면 그렇게 소녀 같으시냐며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해준다그렇다엄마는 소녀 쪽으로 더 아이 쪽으로 한 발짝 한 발짝 자꾸만 걸어가신다

     

근데 내가 엄마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엘리베이터 삼각형 방향이 뭐가 중요하다고나는 심지어 엘리베이터를 타서는 19층을 누르고 왜 안 내려가지 하지를 않나작은방에 들어가서는 내가 여기 왜 왔더라 하는 일은 이젠 놀랍지도 않다

     

며칠 전에는 해바라기 명화그리기 키트를 주문했는데 택배 상자를 열어보니 물감과 붓이 없는 게 아닌가주문내역을 확인해보니 두꺼비집 가리개 해바라기 그림이 결제되어 있었다이런 바보가 있나.

     

검색창을 띄워놓고는 순간 내가 뭐 검색하려고 했었지?......”머리가 하얗다는 게 이거였다방금 전에 한 말도 까먹는 나와는 정상적이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라며 친구는 구박과 진심을 섞어서 치매보험을 좀 알아보라 한다나는 그냥 건망증이고 실수일 뿐이라고 넘겨버리는 중이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어려운 것도 아닌 것을 기억을 못 한다처음엔 심각한 듯도 했으나 이제는 어지간한 건 그냥 그러려니 한다하기야 어제 점심에 뭐 먹었는지를 떠올리려면 잊지 않아야 할 세계사 사건 정도의 에너지가 필요할 정도이니 말이다어제까지 모든 게 마치 전생 같다나는 그냥 오늘만 있는 것 같다

     

설마 내가 이럴 줄 과거의 나는 미리 알았을까나의 메모하는 습관이 꽤 오래되어 하는말이다메모는 약속과 계획을 잊지 않고 잘 지키는데 꽤 아니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지만 메모하지 않은 것은 전혀 기억 못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그래도 메모는 계속해야겠지

     

메모라도 계속되어야 한다굴복하지 말자순순히 그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말자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며 알게 된임종을 앞둔 아버지를 위해지었다는 딜런 토마스의 시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가 떠올랐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 들이지 마오     
노인들이여
저무는 하루에
소리치고 저항해요 
분노하고 분노해요
사라져가는 빛에 대해
엄마의 브이 1
엄마의 브이 2
엄마의 브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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