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육아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언유주 Oct 04. 2020

18. '나는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을거야'라는 덫

불행의 돌림노래

자기가정을 꾸리는 일이 과거가 반복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그 과거를 단절한 기회가 되기도 한다.
<슈퍼노멀 Supernormal> 멕 제이



난 절대로 아빠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거야!
하레 옆에서 늘 친구같은 아빠가 될거야!


이혼 후 내가 하레네 집에 왔던 첫 날, 하레아빠는 말했다.

말투와 표정이 너무나 비장한 나머지 "부모는 친구같으면 안되는거래."라는 말을 했다간 왠지 흥을 깨놓는 사람이 될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아침에 아빠가 출근하는데, 하레가 인사를 안하려고 했다.

어제 저녁에도 집에 온 아빠를 보자마자 표정이 굳어버리고.

"하레야!! 아빠 안녕!!하자~~" 하니까 "싫어~ 싫은데~"하며 몸을 비비튼다.

하레아빠는 실망하고 상처받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하레에게 다가가서 갈비뼈를 간질이며 "왜 싫어~ 응?"하며 억지로 웃는 얼굴을 하고는 나갔다.


아빠가 가고나서 "우리도 기저귀 갈고, 옷 갈아 입고, 의사선생님한테 가보자!"하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데, 하레가 "아빠 싫어!"라고 말했다.

깜짝 놀라서 "아빠 싫어?"라고 묻자, "아빠 싫어."라고 한 번 더 말했다.


바닥에 눕혀 기저귀를 갈고 옷을 갈아입히는데, 하레가 "아빠야."하면서 눈을 감고 자는척을 했다.

내가 "안돼!! 일어나!!"하면서 안달하는 척을 하자, '재밌어'했다.

아빠가 잘 때, 하레는 이렇게 '안달이 나나'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도 하레는 다 느끼고, 알고 있는거다.

지금 하레가 볼때 아빠는 맨날 '잠만 자는' 사람이다.


저녁에는 도어락 여는 소리가 나자, "아빠다!"하고 뛰어 나가더니, 아빠의 빈 손을 보고는 "어? 까까 없네?"하고 휙 돌아서서 다시 나에게 왔다.

아빠가 "아빠, 뽀뽀해줘."라고 해도 들은척 만척.

TV를 틀어 달라기에 리모컨을 주면서 아빠한테 틀어달라고 해, 하니까 "엄마(고모)가 해줘"라고 한다.

저녁을 먹고도 내방에서 놀면서 아빠옆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






일요일 오후 3시.

'이제 좀 그만자도 되지 않나???'싶어서 짜증이 밀려왔다.


아침엔 이해했다.

오랜만에 내가 같이 있는 주말이니까 아빠도 오늘은 늦잠 좀 자야지.

하레가 아빠를 깨우려고 할 때도 "아빠는 피곤하니까 쪼끔 더 잔대."하고 하레를 말렸다.

11시반쯤 되서 다시 하레가 "아빠 깨워도 돼요?"라고 너무 정확하게 물어보길래(온전한 문장으로 말을 잘 못할 때였다) 이제 깨워도 된다고 하니까 방에 불까지 켜고 "아빠, 일어나! 아침이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겨우 일어나서 점심을 먹은 하레아빠는 방에 들어가서 또 자고, 하레는 낮잠을 안자고, 나는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날 나는 감기 몸살기운도 있는데다가 오전 내내 하레 어린이집 선생님 출산선물로 주려고 양모 아기 신발을 만들면서, 하레랑 말하랴, 간식 챙겨주랴, 놀아주랴 정신이 없고, 하레는 자기에게 관심을 제대로 집중하지 앉으니 털실이며 가위를 하나씩 들고 도망가고...

점심을 먹고나면 아이를 아빠에게 맡기고 나도 좀 쉬고 싶었는데, 또 들어가서 잔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서야 어슬렁 어슬렁 거실로 나와서 턱을 괴고 길게 누워 하레랑 같이 TV를 본다.

아아, 정말 아빠랑 똑같다.

'내가 무슨 밥 해주는 사람이냐'고 분통을 터트리던 엄마의 마음도 알 것 같았다.

하레아빠가 내 남편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아무리 전우애로 똘똘 뭉친 우리라지만 다 큰 남매가 갑자기 한 집에 살려니, 사사건건 안 맞는 게 참 많았다.

나랑 동생은 정말 '많이' 달랐다.

일 년에 두 세번 짧게 만나서 늘 웃는 얼굴로 헤어지니까 몰랐을뿐.


동생은 동생대로 참고, 나는 나대로 참고.

또 우리 남매는 원래 이렇게 '꾹 참는 것' 하나는 잘한다.

그렇게 우리 사이에 갈등이 쌓여가는 것도 문제지만, 요즘 아빠를 점점 멀리하는 하레가 더 큰 문제였다.


이대로 놔둔다면 이 간격은 점점 더 벌어져서 나중엔 메울수가 없게 되겠지.

좀 더 커서 밥상에 앉아서 아빠 얼굴은 쳐다도 안보고 카톡만 하고, 아빠가 들어오든 나가든 유령취급할 때가 되면 "내가 너 먹여 살리자고 얼마나 뼈빠지게 고생했는데!!!"하고 분노하겠지.

하레아빠가 두려워했던 가장 '최악'의 일, '아빠처럼 되는 것'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아마 나의 아빠도 자기가 이메일에 썼던 것처럼 '애지중지 키워놨더니' 내가 왜 그러는지 '진심으로' 의아했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너, 앞니에 고추가루 꼈어."하는 말처럼 어떻게 해야 민망하지 않게 말해줄 수 있을까?





이 집안이 이카루스처럼 추락해서, 그 수치심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다가 마침내 로이가 그 에너지를 모두 나에게 쏟아내게 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맨 얼라이브 Man alive> p97 - 토머스 페이지 맥비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부모가 해야할 일은 그 아이가 '혼자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곁에서 도와주는 것, 앞으로 자신만의 '집'을 지을 수 있는 튼튼한 뼈대를 만드는 일을 돕는 것까지가 부모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든든한 뼈대를 지닌 아이는 스스로 자기만의 집을 지어나가면서 벽돌을 잘못 쌓아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분명 멋질거라고 생각해서 칠했던 벽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칠해야 할 수도 있다. 창문은 어느 방향으로 낼 건지, 방은 몇 개나 만들건지도 스스로 결정하고 만들어 나가야 한다.

든든한 뼈대를 지닌 사람은 새로운 도전을 만났을 때,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더 큰 호기심의 부름에 자신을 믿고 도전할 수 있다.


문제는 본인도 기초공사가 잘못되어 흔들리고 불안정한 뼈대를 가진 부모다. 자신이 그렇게 흔들거리고 불안정한 것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인생은 원래 다 그런거야'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린다. 자신과 똑같이 불안정하고 흔들리는 뼈대를 만드는 법을 아이에게 그대로 전수 하거나, 아이가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른 방법으로 뼈대를 만들어나가려고 할 때, 아이를 비웃고 끌어내리며 자신과 같은 방법으로 짓도록 강요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 모든 과정이 진심으로 '사랑'과 '훈육'이라는 이름하에 자행되며, 다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 진지하게 믿기도 한다.


동생이 하레만할 무렵, TV에서 영어로 말하는 외국인을 보고 "저 사람은 왜 말을 못해?"라고 물었다는 이야기를 아빠가 경박스럽게 비웃는 걸 아마 백 번은 들은 것 같다. '영어'가 뭔지도 몰라서, '말을 못한다고 생각한다'는게 아주 우습다는 듯이.

어려서부터 되풀이해서 듣던 이야기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너무 섬뜩하고 슬프다.


어린아이는 당연히 '영어'라는 외국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를 뿐더러 그게 '언어'라는 것도 모른다.

"아빠, 저 사람들은 왜 말을 못해?"라고 아이가 물었을 때,

"응. 저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먼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야. 지금 ㅇㅇ랑 아빠가 이렇게 한국말로 말하는 것처럼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그 나라의 말로 이야기를 해.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나라가 있고,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다양한 언어로 말을 해. 그러니까 넓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과도 지금 아빠랑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려면 외국어를 배우면 되겠지?"하고 말해주었더라면 아이의 궁금증도 해소되고, 먼 나라와 다양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아이의 사고까지 넓혀줄 수 있었을 것이다.


대신 아빠는 '그것도 모른다'며 아이를 비웃고, 만나는 사람마다 아주 웃기다는듯이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자매품으로 국회의사당을 지나면서 동생이 '저기는 아저씨들이 싸우는 곳'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TV로도 실제로도 국회의사당을 볼때마다 그 이야기를 한다.

아저씨들이 왜 싸우는지는 아이에게 알려주지도 않았으면서.


자신의 궁금증은 해결되지 않았고, 자신이 배우지도 않은 것을 모른다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 어렸던 동생은 이유도 모른채 수치심을 느꼈겠지. 자신이 바보라고 생각하게 되고, 질문을 멈춘다. 대신 아는 척을 하는 법을 배운다. 이런 과정이 무의식적으로 반복되어 어른이 되어도 아이는 질문하는 대신 아는척을 한다. 수치심은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든 감정이니까.


집을 지을 단단한 뼈대를 갖지 못한채 어른이 된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한다.

1. 평생을 흔들거리고 휘둘리며 세상을 저주하고 두려워하고 분노하며 살아가는 것.

2. 자신의 흔들거리는 뼈대를 완전히 허물어 버리고, 새로운 토대를 만드는 것.


동생은 1번을, 나는 1번의 삶을 살다가 2번을 택했다.

물론 1번도, 2번도 단단한 뼈대가 없는 삶은 고단하다.




"우리 얘기 좀 하자."

금요일 저녁, 저녁밥을 먹고 동생에게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내가 느끼는 동생의 '문제점'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름 차분하고 상처주지 않게 이야기를 잘 했다고 생각하고 홀가분하게 집으로 와서 주말을 보냈다.


월요일 저녁.

이번엔 동생이 나에게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얼마든지 좋게 말할 수도 있었을 걸, 꼭 그렇게 말해야 했어? 그럴때보면 누나는 '엄마'랑 똑같아."


충격을 받았다.

뭐라고?

내가 그렇게 닮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엄마'랑 똑같다고?


그 얘기를 듣고 며칠을 생각했다.

나는 단지 동생이 '일시적'으로 그런 상태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고 충고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동생 입장에서는 자신의 존재 자체, 살아온 전 인생, 앞으로의 삶에 대한 공격으로 여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우리의 '태도'가 아닌 '존재 자체'를 비난하던 엄마처럼 말이다.

정말 아찔했다.


내가 볼 때 동생은 '게으르고', 동생이 볼 때 나는 '지나치게 뽈뽈거리며' 산다.

또 나는 하레에게 그 어떤 '법적권리'도 없어서 동생이 언제라도 떠나라고 하면 가야하니 늘 내가 '약자'라고 생각했는데, 동생은 동생대로 내가 '누나'니까 말 못할 불편한 것들도 많았겠네, 싶고.

"우리 둘 다 서로 꾹꾹 참다가 이렇게 터트리지 말고 앞으로는 그때 그때 서로 불편한 건 이야기하고 살자!"하고 결국 좋게 마무리 됐다.

동생도 하레와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눈에 띄게 노력했다.






당신이 원하는 가족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가족보다 더 가족같은 모습으로 당신 곁에 있겠습니다.

마음이 이어지는 가장 가족같은 가족으로 당신을 이해하겠습니다.

<퍼펙트 패밀리> -박혜수, MMCA 올해의 작가상2019





왜 동생은 그렇게 싫어하는 아빠를,

나는 그렇게 싫어하는 엄마를 똑같이 닮아가고 있는거지?


결국 나도 엄마처럼 내가 만든 '화목한 가족의 모습은 이래야해.'하는 사진속에 내가 원하는 포즈대로 서지 않는다고 일방적으로 동생을 비난한 건 아닐까?

그러고보니, '화목한 가정'은 과연 어떤 모습인걸까?

정말로 나, 동생, 엄마, 아빠 우리 각자가 꿈꾸던 '퍼펙트 패밀리'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전체 가족의 96%가 역기능적이다. - 버지니아 새티어


내가 집을 나왔을 때, 엄마가 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건지도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정교하게 구축해둔 '픽처 퍼펙트'한 가족사진을 찢고 뛰쳐나온 나를 용서할 수 없었겠구나.

그런 엄마가 자신의 '이상'을 위해 나를 포함한 가족들을 '도구'로 사용했다며 분노 했으면서, 어쩌면 나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도 '사랑 넘치는 가족'을 만들고 싶은데, 막상 그런 가족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으니 자신의 '환상'을 우리 가족 각자를 재료로 해서 어떻게든 구현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아빠처럼 살지 않겠다'라는 마음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대안이나 분명한 목표가 있지 않는 한 결국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던 그 인물'을 무섭게 닮아간다.

그냥 가족 각자의 존재와 개성을 인정하고 때로 싸우고 화해하고 양보하면서 같은 부분 안 건드리려고 서로 조심하는 것.

그게 진짜 '행복한 가족'이구나, 하고 느꼈다.


'퍼펙트'한 가족같은 건 없어.
'퍼펙트'라는 틀 속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순간 불행이 시작된다.

아주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가 부당하게 파괴적 권리를 행사하여 고통받은 자녀들은 이로 인해 죄책감, 분노, 수치심, 우울, 격분과 같은 감정들을 내면에 쌓는다. 이 자녀는 사랑받고, 존중받아야 할 자신의 권리가 부당하게 착취되었다고 느끼고 무고한 상대에게, 즉 자신의 배우자 또는 자녀들에게 자신에게 일어났 똑같은 방식으로 파괴적 권리를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파괴적 권리는 세대 전수로 이어지며 다음 세대로 가정의 불행을 전수시킨다.


우리에게 상처를 준 부모는 괴물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처럼 그들 역시 험난한 세월을 살아왔고 부당한 가족관계에서 피해를 입었던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하다. 우리 역시 이러한 반복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늘 되풀이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족의 두 얼굴> p152 - 최광현

매거진의 이전글 17. 엄마들은 너무 대화가 고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