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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사삼공삼 Apr 25. 2022

어느 겨울 출근길

2020.01

여름 방학보다는 두 배 정도 되지만, 그래도 짧게 느껴지는 이 겨울방학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음,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아주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이미 면허가 있는 상태는 드물 것이고, 심지어 야간 아르바이트인 경우는 더욱더 없겠지.


요즘 구강악안면외과에서 야간 당직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강남 한가운데에 있는 병원에서 내 걸음으로 20분 정도의 거리에 숙소를 잡고, 낮에는 자거나 친구와 놀다가 저녁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환자를 본다.  


저녁 출근길은 생각보다 의외로 재미있다. 삼성에서 일할 때도 느꼈지만, 고된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향하는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서 일하러 가는 길이라는 건 생각보다 묘한 느낌을 준다. 이대로 유턴해서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파묻히고 싶다는 게으른 생각도 들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알차게 살고 있다는 이상한 뿌듯함도 있다. 어차피 그들이 일할 때 나는 자고 있었으니 별 차이는 없는데도.


특히나 이곳의 출근길은 볼거리가 많다. 숙소 앞 작은 골목부터 조명 가게로 가득하고, 큰길 가의 가로수에는 똑 떨어질 것 같은 전구 장식으로 눈부시다. 걷다 보면 온갖 종류의 가구 가게를 지나치게 되는데, 통유리창 너머로 물 건너 영국 스타일, 이탈리아 스타일도 엿볼 수 있고,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의자나, 잠깐 누우면 그대로 잠들어버릴 것 같은 침대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생각은 이렇게 흐른다. 와아, 저 테이블을 집에다 놓으면 정말 예쁘겠다. 우오, 저 책장 진짜 탐난다. 이야, 부엌 너무 깔끔하다. 그리고 대부분 이렇게 끝난다. 으으, 그림의 떡. 언젠가는 저런 집에서 살겠어. 정말 예쁘게 꾸밀 테다.


마치 지금 집에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 지금도 내 집은 예쁘다. 나무 선반으로 된 책장은 좋아하는 책들로 가득하고, 구석구석 신경 써서 고른 가구로 채워져 있다. 좋아하는 그림도 많고, 친구들이 선물해준 장식품, 멋진 추억이 담긴 기념품도 많다. 취향에 딱 맞는 디퓨저를 써서 좋아하는 향도 난다. 지금 내 집은 아주 오래전부터 꿈꿔오던 이상에 가깝다.


이 집을 갖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시작된 ‘내 집 꾸미기 프로젝트’였으니까, 적어도 5, 6년 이상 진행된 작업의 결과물인 것. 사소한 물건 하나하나에 정말 내 취향이 과연 무엇일지 고민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온전한 내 것으로 인정하는 과정. 무언가가 마음에 드는지 혹은 들지 않는지 판단하는 과정은 크게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힘이 들었던 것은 기다리는 과정이었다.


짧게는 주문한 물건이 먼 길을 거쳐 나에게 오는 과정, 길게는 이 모든 것들이 모여서 완성되는 과정. 올바른 조각 하나하나를 주워 모으는 긴 기다림. 인내. 참는 것. 아무래도 이건 잘못 산 것 같은데, 실패한 것 같은데. 한숨 한 번 푹 내쉬고, 다시 한번 장바구니를 채워 보는 것, 그래도 한 번 더 기대를 걸어보는 것. 일어나서 한 번 더 시도해보는 것.


얼마 전 오래 동안 끌어왔던 어떤 일 하나를 마무리 지었다. 이제 그와 관련된 일들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좀 더 온전하게, 앞으로 몇 년을 기다려야 완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이상에 가깝게 마무리될 것을 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 인내하는 것, 지치더라도 다시 일어나 또 시도하는 것, 도전하는 것. 그리고 결국엔 성공할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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