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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사삼공삼 Apr 13. 2021

흰 제비꽃

흰 제비꽃이 꽃을 피웠다. 이전에도 이야기한 적 있지만, 이미 길가에 뿌리를 내리고 여긴 내 영역이다 선포한 제비꽃을 캐어 화분에 심는 건 항상 실패했다. 이파리가 수북하고 꽃이 잔뜩 핀 데다 뿌리도 튼실한 제비꽃이든, 이파리 두어 장에 꽃 한 송이를 가냘프게 매달고 있는 제비꽃이든 상관없었다. 이미 제한 없는 땅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는 데 맛을 들인 제비꽃은 화분을 거부했다.


하지만 어렵다고 포기하면 내가 아니지. 옮겨 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씨앗을 뿌려 심으면 될 일 아닌가. 제비꽃을 집에서 키우겠다 마음먹은 것이 벌써 4년 전. 봄이 되자 눈에 불을 켜고서 예쁜 제비꽃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제비꽃과 열매를 발견하면 바닥에 쪼그려 앉아 씨앗을 빼앗아 왔다. 옆에 누가 있든 상관하지 않고,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도 잊은 채로.


2017년 봄, 청계천을 걷다 개천이 불어도 인도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담을 쌓은 곳에, 그 돌 틈새로 흰 제비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저런 곳에 씨앗이 굴러 들어가서 또 이렇게 튼튼하게 자라났을까. 여느 평평한 들판에 자리를 잡은 제비꽃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큰 녀석이었다. 그 아이를 보고서, 잠시만, 하고 너의 손을 살짝 힘주어 잡은 뒤 놓았다. 너는 응? 하면서 왜 그러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저기 흰 제비꽃이 있어! 하고 소곤거렸다. 잠시만 다녀올게.


치렁한 플레어스커트 자락이 흙바닥에 다 쓸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 길 가장자리 절벽에 가까이 붙어 쪼그려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 예쁜 흰 제비꽃을 뿌리째 뽑아 집에 가져가는 상상을 하다, 아 역시나 죽어버리겠지, 하고서 체념하고 겨울을 버티다 노랗게 말라붙은 이파리에 눈길을 주었다. 겨울을 버틴 것은 이파리만이 아니었다. 아마도 작년에 느지막이 피운 꽃이 맺은 열매였겠지. 바싹 마른 열매에 아직 부모의 품을 튀어 나가지 않은 씨앗이 달려 있었다. 바람을 서로 막아줄 친구 하나 없이 돌 틈에서 한겨울 냉풍을 맞으며 절로 저온처리가 되었을 그 씨앗을 집에 가져다 심으면 반드시 싹이 틀 것만 같았다.


나는 청계천으로 굴러떨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끼며 손을 슬금슬금 뻗어 흰 제비꽃 씨앗을 거머쥐었다. 그동안 너는 주말 오후,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로 빼곡한 그 길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은 내 옆에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그 작은 씨앗 양껏 손에 넣은 후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서서 너를 계면쩍게 바라보았다. 미안하다고 말했던가. 너무 예쁜 흰 제비꽃을 보아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하고 변명했던 것 같다. 너는 괜찮다, 괜찮다고 했었지.


일어나서 손을 보니 한 손은 흙바닥을 짚느라 더러워졌고, 다른 한 손에는 열매와 씨앗이 잔뜩 들려 있어 다시 너의 손을 잡기는 어려웠다. 어쩔까 고민하다 씨앗을 주머니에 탈탈 털어 넣고, 외투에 두어 번 쓱쓱 닦은 다음 다시 너에게 손을 잡아 달라고 내밀었던가. 딱히 서운하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던 것을 보니 너는 착하게도 내 손을 또 잡아 주었나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렌타인이었던가. 네가 준 선물을 받고 울어버렸다. 타인이 준 선물을 받고 운 건 생전 처음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하찮고 아무것도 아닌 물건 하나에 그토록 다정한 마음을 담을 수 있는지. 어떻게 이토록 날 생각할 수 있는지. 너 같은 사람이 아빠인 딸은 참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너와 아주 오래도록 함께하는 생각을 하고, 이야기하고, 행복했었는데.


너는 벚꽃이 지던 작년 5월쯤에 결혼했다. 벚꽃처럼 화려한 사람과 함께. 네 프로필 사진이나 인스타그램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못했던 나와는 달리, 그 사람은 시작과 동시에 그 모든 곳에 등장했다. 내가 입을 생각도 하지 않을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반짝거리는 장신구를 달고, 높은 구두를 신은 그 사람. 검은 생머리를 길게 기르고 곱게 화장을 한 사람. 일하느라 바싹 깎은 내 손톱과는 너무나 다른, 길게 길러 알록달록하게 색칠한 손톱까지. 그 사람은 앞에 놓인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인 양 침착하고 단정하게 앉아 거울을 보며 사진을 찍었다. 그 모습은 심지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혹시 네가 원했던 건 저런 것이었을까. 들꽃 씨앗을 줍겠다며 옷을 버리고 손을 더럽히는 사람이 아니라, 곱게 화장하고 예쁜 옷을 입고 손가락과 목에 반짝거리는 것들을 걸치는 사람. 어디로 튈지 모르고, 엉뚱한 행동을 하다 헤헤 웃는 사람이 아니라 깔끔을 떨고 우아함을 흘리는 사람이 좋았던 걸까. 끊어질 듯 이어진 생각은 남루한 내 모습에 닿았다. 왜 나를 떠난 너에게 아직도 이렇게 상처받아야 하나. 비록 겉모습은 남루할지언정 나는 빛나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다만 내 반짝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내 속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너는…너는. 그걸 몰라주었거나, 아니면 겉마저도 반짝거리길 원했거나.


잊었다. 잊어간다고 생각했다. 아, 이젠 다 잊었구나, 하고 방심했다. 하지만 시간은 상처를 무디게는 했을지언정, 없애지는 못했다. 상처는 무엇으로 낫는가. 무얼 구해다가 발라야 하나. 흉터는 질기게도 남아서 봄날 흰 제비꽃 화분에 꽃이 피어날 때 마다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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