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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사삼공삼 Nov 08. 2021

21.11.03

실습 가운

드디어 실습 가운이 도착했다. 가게에 가서 치수를 재고 난 다음부터 얼마나 기다렸는지! 올해 말까지 임상 의학 이론을 다 배우고 나면 이제 내년부터 이 가운을 입고 병원으로 실습을 하러 가겠지. 병원에 가는 것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닌데 괜히 두근거렸다.


그 몇 주 사이에 살이 좀 쪘는지, 아니면 맞춤 제작이라 치수가 딱 맞아서 그런 건지 가운은 몸에 착 달라붙었다. 새삼 살을 빼야지, 에이 실습 돌면 어차피 살 빠지겠지. 단추를 잠그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얇고 흰 가운 한 장 덧입었을 뿐인데 이렇게 사람이 달라 보일 수가! 그런데 정말 달랐다. 뭐가 달랐냐고? 내 앞에 서 있는 남자 동기의 가운과 내 가운이 달랐다.


그의 가운 주머니 옆에는 주머니 길이만큼의 작은 틈새가 있었다. 그 구멍으로 그는 바지주머니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얇은 가운  천 주머니에 넣었다가 허리를 숙이면 주르르 바닥으로 흘러 내릴 것이 뻔한 물건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필요할 때마다 단추를 풀거나 가운 앞섬을 헤쳐 옆으로 벌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내 가운에는 그 틈새가 없었다.


저 틈새 엄청 유용해 보이는데 왜 내 가운에는 없지? 주위를 둘러보니 남자 동기들의 가운에는 모두 그 틈새가 달려 있었고, 여자 동기들의 가운에는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옆에 있던 여자 동기에게 물었다. 우리는 왜 저 구멍이 없지? 그 친구가 대답했다. 그러게요 언니. 저거 굉장히 편해 보이는데. 우리는 가게에 전화를 해서 가운에 저 틈새를 달아줄 수 있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여기 오늘 가운 받은 ㅁㅁ 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학생인데요, 혹시 가운 수선이 가능할지 여쭈어보려구요.


무슨 수선이요?


아, 가운 주머니 옆에 있는 틈새가 저랑 몇몇 친구 가운에는 없더라구요. 혹시 만들어주실 수 있나요?


 잠시만요. 확인 좀 해볼게요.
 
 아, 그건 남학생들 가운에만 들어가는 거예요. ‘원래’ 여학생가운에는 없어요.
 
 아 그런가요. 그런데 저 틈새가 있으면 편할 것 같아서요. 오늘 오후에 가운 가져다 드리면 수선해서 만들어주실 수 있나요?


아니, 그럼 처음부터 가운을 맞출 때 그걸 달아 달라고 말씀하셨어야죠.


그럼 처음에 가운을 맞출 때 저 틈새를 달 수 있는데 할 거냐고 물어 보셨어야죠. 남학생들한테는 전부 물어보고 달겠다고 해서 달아 주신 것도 아니지 않나요? 가격 차이도 없는데 왜 남학생들 가운에는 다 달아 주시고 여학생들 가운에는 다 안 달아 주신건가요?


깊은 한숨. 그럼 서울에 다시 가지고 가야겠네.


침묵.


네, 오늘 오후에 가져오세요. 수선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원래’ 여학생 가운에 없고, 옵션으로 달 수 있는 디자인인데 필요한지 물어보지도 않았고, 일괄적으로 남학생 가운에만 모두 달아주고, 달아줄 수 있냐고 문의하니 싫어하는 티를 내며 이걸 달려면 내가 번거롭게 ‘서울까지’ 또 가야 하는데 굳이 이걸 달아야겠냐는 의미의 혼잣말.


내가 진상 고객이었던 걸까? 예민했던 걸까? 별 것 아닌 옷 디자인 차이를 성 차별로 만들어버린 걸까? 일주일 가까이 고민하고 있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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