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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사삼공삼 Jun 26. 2023

2023.06.24

사랑이야, 사랑.

한창 의전원 입시 준비를 위해 추천서를 받으러 다닐 때였다. 학부 지도교수님께 용기를 내어 연락을 드리고, 빈 손으로 가기 민망해 근처 맛있는 빵집에 들러 빵과 커피를 샀다. 똑똑, 문을 열고 들어가니 4년 전 모습 그대로 교수님이 책상에 앉아 계셨다. 교수님! 제가 빵을 사왔어요! 하며 수줍게 외치자, 아휴, 미성아, 네가 이런 걸 들고 오면 내가 장관이 못 되잖니! 하시는 거다. 앗, 이를 어째! 그럼 같이 먹을까요 교수님! 마주앉아 흰 설탕가루를 듬뿍 묻힌 생크림 빵을 뚝딱 해치우고, 커피를 홀짝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동안 병원에서 일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러다 어떤 환자를 만났는지, 어떤 교수님을 보았는지. 그 교수님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그래서 왜 의대에 가고 싶어졌는지. 찬찬히 듣던 교수님은 질문을 하셨다. 미성아. 너 왜 그런 마음이 생긴 것 같니?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름 모를, 있는 줄도 몰랐던 마음이 뒤에서 몰래 다가와 등을 톡톡 두드린 것처럼. 말문이 막힌 채로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자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사랑이야, 미성아. 사랑이야.


사랑. 타인을 향한 사랑. 당신이 건강해지는 걸 보면 나는 행복해진다. 이 마음을 깨닫고 실천하는 일. 다만 매일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리느라 골치가 꽤 아프고 잠도 솔찬히 줄어들고 허리도 많이 아프겠지만. 용기를 내어 한 뼘 씩 당신을 삶으로 더 가까이 당겨오는 일. 난 그 일이 하고 싶었어. 교수님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남은 입시준비기간을 무사히 헤쳐나갔다. 그리고 눈 감았다 뜨면 꿈일까 두려워 합격증을 프린트해 품에 안고 잠든 날이 어제 같은데, 어느새 졸업 학년이다.


철 든 이후 배경으로 병원을 그린 그림 속에서 주구장창 살아오던 터라, 다른 곳을 무대로 한 이야기가 늘 궁금했다. 그 중에서도 법을 배경으로 벌이는 살벌한 공방은 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렇게 변호사, 검사, 판사가 쓴 에세이가 집에 몇 권 쌓아 두게 되었는데, 어느 날 첫서재지기님 추천으로 '형사 박미옥'을 읽게 되었다.


조금 투박하지만 멋진 문장이 소복히 모여 있었다. 차분하게, 때로는 괴롭게. 나직하게, 가끔은 추억에 젖어서. 그리고 이 문장 하나를 검거했다. ‘형사의 기술과 연륜이란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디테일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노력과 맷집, 성찰을 요구한다.’


형사도, 의사도, 간호사도. 그러니까 결국 세상 모든 일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구나. 다만 그 사랑에 맷집과 성찰을 더하느냐, 인내심을 첨가하느냐의 차이일 뿐. 앞으로 이어질 내 삶에서, 사랑이라는 도우에 무슨 토핑을 얹고 어떤 피자를 구워낼 수 있을까.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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