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가득한 개인 기록용 감상문
2025.09.17.
수작, 걸작, 명작의 재개봉이 많아 행복한 요즘이다. 특히 ‘모노노케 히메’ 같은 경우 개봉 당시에는 못 보고 케이블TV나 구민회관에서 한 걸 보았다. 몽환적인 분위기 때문에 지브리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했었다. 지금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모노노케 히메’가 가장 좋다. 사실 지브리 작품은 왠만하면 좋아한다. 아, 정정하자. 하야오 옹 작품 위주로 좋아한다.
줄거리는 이미 다 아는 내용이니 다시 보면서 새롭게 느낀 것 위주로 적어볼까 한다.
예전에는 자연과 인간의 대립을 그린 작품으로 알았다. 예전 포스터에는 자연을 강조한 문구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들개신(모로의 자식)과 산이 정면을 노려보는 모습은 자연의 분노로 읽혀지기에 충분했다.
이번에 다시 보니 자연과 인간의 대립을 그리고 있지만 그보다 더 포괄적으로 자연을 다루고 있다. 이것이 자연과 인간의 대립과 무엇이 다르냐 하면 보통 두 세력의 대립에서의 자연은 동물 같이 인간을 제외한 생명체를 말하지만 뒤에서 말한 자연은 인간과 동물을 모두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말하며 나아가 생명과 죽음까지 다룬다.
사슴신은 자연, 그러니까 신, 생명과 죽음을 일컫는 존재다. 사슴신은 숲에 살기 때문에 자연—동물의 편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지만 사슴신은 인간과 동물, 하물며 식물에게도 공평한 생명과 죽음의 신이다. 멧돼지신이 분노하는 것도 이해된다. 사슴신은 우리=동물=자연의 신인데 왜 자신이 입은 상처를 돌보지 않냐는 것이다. 어릴 때는 사슴신이 제멋대로라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보니 사슴신은 제멋대로가 아니다.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일례로 아시타카가 총에 맞은 상처는 치료해주지만 저주로 생긴 멍은 고치지 않았다.
아시타카는 이것으로 어느 정도 눈치를 챈다. 사슴신은 불쌍한 존재를 포용하는 따뜻한 존재가 아니라 냉정한 존재라는 걸 말이다. 아시타카가 어떤 인간들보다도 냉철하고 침착한 판단을 내리는데 그 이유가 자신의 경험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시타카에 매력을 그다지 느끼지 못하는 게 초인처럼 보여서 그런 것 같다. 절대 잘 생겨서가 아니다. 얘기 나온 김에 적자면 외모가 전부는 아니지만 잘 생겼으니까 산이나 마을 여자들이 친절하게 대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반은 농담이다.
생명과 죽음의 신의 장대한 마지막은 그야말로 코스믹 호러였다. 어릴 때도 진짜 기괴하다라고 생각했는데 좋은 화질로 보니까 더 기괴했다. 목을 찾아 헤매는 몸통. 밤하늘을 담은 투명한 몸. 적도 아군도 없이 모조리 휩싸는 죽음의 손길은 냉정하고 공평하게 느껴졌다. 죽음은 이렇듯 공평하다. 식물은 말라 썩고 동물은 죽어 문들어진다. 그것이 극히 당연한 이치이며 섭리다. 머리를 찾은 사슴신이 모두에게 생명의 빛을 뿌린 건 애니메이션 주타겟층 때문이 아닌가 싶다. 현실적인 이유가 아니라 사슴신이 생명의 빛을 뿌린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지지고 볶고 싸우더라도 살라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 식물 모두 태어났으니 살라는 것이다. 그들 나름의 방식대로. 자신들이 믿는 방향으로. 자연은 누구의 편도 아니니 말이다.
산이 아시타카는 좋지만 인간은 밉다는 대사는 작품을 관통하는 대사처럼 들린다. 모두를 좋아할 수 없고 모두를 싫어할 수 없다. 자연엔 선을 긋고 편을 나눌 수 없다. 바람을 가두어 두고 가를 수 없듯 자연=인간은 좋은 점이 있다면 나쁜 점도 있는 것이다. 이건 단체가 아니라 개체에도 해당한다. 애초에 나눈다는 게 불가능하다.
나이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보이는 게 달라지는 게 참 재밌다. 좋은 작품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재개봉이 기다려지지만 이왕 개봉하는 거 좋은 영화가 개봉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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