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번 출구

스포 가득한 개인 기록용 감상문

by 송건자
‘8번 출구’ 포스터

2025.10.23.


일본이 일본했군.

게임으로 유명한 ‘8번 출구’가 영화로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맨처음 든 생각이다. 만화건 게임이건 조금 유명해진다 싶으면 실사화를 하는 못된(?) 버릇을 또 발휘하는구나, 비웃었다. 리미널 스페이스, 소재를 가지고 있으니 ‘8번 출구’를 찾아 헤매는 인물이 이상 현상을 만나 고통 받는 이야기면 적당하겠다. 이상 현상은 괴기스럽게 묘사하면 사람들이 엄청 좋아할 거고 일본 공포 영화는 이런 묘사는 잘하니까 잘해면 평작 정도 나오겠구나 얕잡아 봤다. 그런데 제78회 칸 영화제에 비경쟁 부문에 초청되고 관람평이 나쁘지 않은 걸 보고 흥미가 돋았다. 하나 더 보고 싶은 이유가 있었으니 그건 메가박스 오리지널 티켓이다. 노란색에 8번 출구만 적혀 있는데 이쁘다.


게임 ‘8번 출구’를 해봤거나 유튜브에서 본 사람이라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 궁금할 것이다. 95분이니 최근 개봉하는 영화치고는 짧은 축인데도 게임 클리어 시간 자체가 그리 길지 않아서 어떻게 내용을 채울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공포와 미스터리를 적절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게임의 강점인데 잘 살릴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영화는 이 강점을 그대로 가져왔다.


영화를 풍부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 건 주인공의 서사다. 게임에서는 이유도 모르고 지하도에 갇혀서 8번 출구를 찾는 내용이라면,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이유도 모르고 지하도에 갇힌 건 같지만 그가 처한 상황을 더한다. 니노미야 카즈나리가 연기한 헤매는 남자The Lost man는 10시까지 파견 근무지로 가야 한다. 천식이 있고 헤어진 여자친구가 임신했다는 전화를 받는다. 그러고 나서 지하도에 갇힌다. 그는 전여친이 아이를 낳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가 머릿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이 설정은 영화의 폭을 넓히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중요하다. 헤매는 남자가 지하도에 갇히기 전에 탄 지하철에서도 갓난아기와 관련한 이슈가 있다. 시끄럽게 우는 갓난아기를 엄마가 달래려고 하지만 한 남자가 만원 지하철에 갓난아기를 태우는 게 민폐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헤매는 남자는 그 상황에서 눈을 돌리며 에어팟을 끼고 도망치듯 내린다. 내려야 하는 역이라서 내렸겠지만 젊은 엄마에게 소리 치는 남자에게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으로 눈을 돌리고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는다. 헤매는 남자는 이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진다. 이러한 심상이 영화 내내 저변에 깔린다. 공포 영화답게 아기 울음 소리를 소름 끼치게 잘 사용하고 또 이상 현상의 한 부분으로 전여친이 등장한다. (전여친이 나타나는 게 이상 현상…?) 아기에 대한 죄책감은 결말까지 이어진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추가 요소는 걸어가는 남자The Walking man이다. 걸어가는 남자는 이상 현상의 일부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역시 헤매는 남자처럼 플레이어였다. 그는 8번 출구로만 나가야 한다는 마지막 규칙을 어긴 탓에 자아를 잃고 지하도에 영영 갇히게 되었다. 괴기한 인상을 가진 이 남자도 그 나름의 사연이 있다. 오랜만에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한 시라도 빨리 8번 출구를 나가야 하는데 자꾸 0번으로 되돌아온다. 헤매는 남자에게 걸어가는 남자가 이상 현상이었다면, 걸어가는 남자에게는 여고생이 이상 현상이다. 그 여고생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지하도에 갇혀서는 규칙을 어겨서 영영 갇히게 되지 않았나 싶다. 일부러 남았을 가능성도 있다. 매일 똑같이 만원 지하철에 타서 출근하는 인생보다 낫지 않냐는 대사가 있기 때문. 지하도에서 플레이어의 마음을 꺾으려는 유혹일지도 모르겠지만.


하나 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니 소년The boy다. 소년은 헤매는 남자와 걸어가는 남자에게 남은 일말의 양심 같은 존재다. 소년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 때문에 걸어가는 남자는 지하도에 갇히고 헤매는 남자는 8번 출구를 통해 현실로 돌아온다. 이게 사실일지 지하도에서 만든 장치일지 모르겠으나 영화에서 보여지기로 소년은 헤매는 남자의 미래의 아이로 보인다. 이상 현상으로 넘쳐나는 지하도니 시공간을 뛰어넘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소년은 아빠를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하고 또 미래의 한 장면에서는 헤매는 남자의 아이로 나오기도 하는 걸 보면 지하도가 만든 환상이 아닐까 싶다. 소년을 구한 헤매는 남자는 결국 8번 출구를 통해 현실로 돌아간다. 여기서도 연출을 잘했다고 생각한 게 지하도에서의 출구하면 지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생각하는데 여기서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나온다. 등장인물과 관람객에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선사하는 솜씨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현실로 돌아온 헤매는 남자. 남자는 전여친이 기다리고 있는 병원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탄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는 갓난아기와 소리 지르는 남자를 만난다.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은 상황이다. 깜깜한 지하 터널을 보던 헤매는 남자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고 갓난아기와 소리 지르는 남자 쪽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든 소설이든 고난을 겪은 주인공에게 변화가 있어야 한다. 변화에는 성장도 있고 좌절도 있다. 본 영화에서는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주위에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하지 말자. 헤매는 남자는 SNS를 통해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손쉽게 본다. 정작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 우는 게 당연한 갓난아기와 젊은 엄마에게 소리 지르는 남자는 무시한다. 비단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인터넷 너머 이슈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물론 전쟁 같이 절대 일어나선 안되는 일에는 관심을 가져야겠지만 그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내 힘으로 결과를 바꿀 수 있는 일에는 정작 무관심하다.


이건 자신의 일에도 적용할 수 있다. 헤매는 남자는 ‘모르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전여친의 전화에도 잘 모르겠다, 고 답한다. 그의 답변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살다보면 점점 더 모르겠는 일이 많다. 어떤 선택이 올바르고 실패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헤어진 연인에게 아기를 낳으라고 하는 게 옳은지, 헤어진 여친과 다시 시작하는 게 맞는지 세상에 정답은 없다는 걸 알지만 누구나 정답을 찾고 싶다. 한 번 사는 인생이니까. 지금 흘려보낸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이 선택이 먼 미래까지 영향을 주니까. 이유는 전부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진부하다. 알지만 주저앉는다. 고민의 무게에. 하지만 헤매는 남자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상황을 해결한 방법을 알 수 없지만 그가 외면하지 않고 움직였다는 게 중요하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출구가 없는 지하도에 갇혔는지도 모른다. 매일 똑같은 일상에 똑같은 업무에 똑같은 공부에 똑같은 출퇴근. 밥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세밀한 차이만 있을 뿐 그 행동에는 변함이 없다. 지겹고 지루하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지루한 일상도 하나만 바꾸면 달라진다. 마음가짐. 모르겠다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흘러가는 대로 살다간 나갈 수 없다. 그러니 이 순간부터라도 조금 달라지는 건 어떨까?


마지막으로, 에어팟 프로 성능 최고! 노이즈 캔슬링이 대단하다. 영화적 연출이겠지만 성능이 대단해. 그리고 자막 연출도 좋다. 영화에 포함된 자막이 아니라 현지화 자막! 신경 쓴 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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