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열의 음악앨범, 2019
마치 순정만화 같다. 1994년 10월 1일 유열이 라디오 DJ로 첫 방송을 시작한 그날 오전, 현우와 미수는 첫 대면을 통해 서로가 서로의 인연임을 직감한다. 짓궂은 하늘은 둘을 맺어놓고는 멀리 떨어뜨린다. 세월은 흐르고 주변 풍경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상대방을 향한 남녀의 감정은 처음 느낌 그대로다. 정지우 감독의 “유열의 음악앨범”은 낭만을 품기 힘들어진 세상에서 낭만을 간직했던 그 시절에 보내는 러브레터이며, 90년대를 아우르는 대중문화와 라디오 방송에 바치는 오마주이다.
화면 속 옛 시절은 정감으로 가득하다. 동네 빵집, 구식 간판, 윈도우 95와 천리안, 폴더폰 등 익숙한 소품은 잠시 추억에 잠기도록 한다. 연출은 전작 “사랑니”, “은교”처럼 연애 감정에 깊이 몰입한 주체의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 데 힘을 기울인다. 카메라는 햇살을 등진 김고은과 정해인의 얼굴 클로즈업을 통해 서정성을 자아내며, 만남이 거듭될수록 밀접해지는 거리와 로맨틱한 제스처를 강조한다.
신승훈, 이소라, 핑클, 루시드 폴 등 대중가요의 힘을 빌린 영화는 기다림과 느림의 미학이 존재했던 아날로그 시대의 연애 속 애틋함을 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관객의 체험은 그 의도와 양상을 달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러닝타임이 흐를수록 이야기는 김 빠진 탄산음료 같다. 그 인상은 밋밋하고 심심하다. 네 가지 시간대를 배경으로 하는 에피소드식 구성에서, 남녀의 정서적 교감은 꽃필 듯하다가 제자리에 머문다. 둘이 한창 썸을 타기 시작한 94년 친구들과 사고에 연루된 현우는 잠적을 감춘다. 97년 기적처럼 제과점 앞에서 조우한 그들은 현우의 군입대를 앞두고 하룻밤 함께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3년 후 미수가 만들어준 이메일 계정의 비밀번호를 푼 현우는 그녀와 연락이 닿지만 하필 그날 저녁 사건이 발생한다. 분절적인 이야기 전개는 마치 부풀어 오르는 풍선을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인물의 내면에서 자라나는 감정의 싹을 억누른다.
서사에는 그렇다 할 위기가 부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2005년 현우의 학창 시절 트라우마는 미수와의 관계에서 걸림돌로 작용하지만, 그의 내적 갈등은 90년대를 통과한 청춘의 경험과 거리감이 느껴진다. 현우와 미수의 다툼 이후 출판사 대표가 개입하는 삼각관계는 멜로 장르의 전형적인 구도이다. 영화의 후반부 현우는 돌아선 미수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대표의 차를 뒤쫓아 달리지만, 클리셰적 클라이막스에 마음이 동했던 관객은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
과거에 유행했던 “8월의 크리스마스”나 “클래식” 같은 작품이 오늘날 낯설어지는 것은, 그만큼 현대인의 인식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일편단심이라는 말은 쿨하고 다채로운 인간관계에 익숙한 카카오톡 시대에서 공상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정통 멜로를 지향하는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현우와 미수의 캐릭터는 판타지에 기초한다. 혈기왕성한 20대인 그들은 왜 다른 이성과의 교제를 시도하지 않았는지, 군 제대 후 미수가 살았던 집을 계약할 만큼 현우의 애정은 왜 그토록 각별한지, ‘운명’이라는 단순한 설정은 제기되는 의문을 해소하기에 부족함이 있다.
“유열의 음악앨범” 속 연애는 리얼리티보다 순정만화적 감상주의에 기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매사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에서 배우의 연기는 침체 상태에 빠진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처럼 호감 사는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는 정해인은 대상화된 인물 속에서 모호한 감정 표현으로 일관한다. 즉흥적인 리액션으로 활기를 불어넣는 김고은의 에너지는 캐릭터의 지나친 섬세함에 의해 짓눌린다.
조연 캐릭터는 전형성에 기대고 있다. 자기희생을 삶의 모토로 삼는 미수의 언니 은자는 남녀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맡지만, 서사에서 그의 존재는 다소 잉여적이다. 능글맞게 미수에게 대시하는 출판사 대표는 현우의 대립항을 넘어서 보다 인간의 복합적인 면모를 지닐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심하게 공들인 디테일로 재현된 시대 배경에서, 반복되는 남녀의 우연적 만남은 확고한 의지를 통해 운명적인 사랑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러나 느린 템포 속에서 펼쳐지는 연애는 현실 속 생동감 넘치는 청춘의 연애와 접점을 잃어간다. “유열의 음악앨범”을 보고 나서 주로 기억에 남는 것은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같은 과거를 향한 그리움의 정서이다. 물론 영화는 드라마보다 과거를 실감 나게 재현하기에 적합한 매체지만, 그 묘사가 과거의 방식에 기대고 있을 때 영화는 외계에서 온 것처럼 생경해 보인다.